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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여자’ 노라문과 ‘한국남자’ 정해성은 누굴 찍을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CJ ENM 제공]

노라문. 36세 여성. 한국계 미국인. 한국이름 문나영. 직업 극작가. 유대계 남편과 뉴욕에서 거주중.

정해성. 36세 남성. 한국인. 병역필. 공대 졸업 후 일반기업체 근무. 미혼. 부모와 서울서 살고 있음.

‘미국여성’ 노라문은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디를 지지할까.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찍을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선택할까.

‘한국남자’ 정해성은 보수성향일까 진보성향일까. 오는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제3의 소수 정당 후보들 중에서 어디에 투표할까.

‘노라’(그레타 리 분)와 ‘해성’(유태오 분)은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장편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의 두 주인공이다. ‘전생’(前生)이라는 뜻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영화는 ‘인연’이라는, 한국적으로 해석된 불교 사상을 모티브로 젊은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그렸다. 두 남녀는 어린 시절 단짝으로 지내다 나영(노라)의 캐나다 이민으로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나는 커서 쟤랑 결혼할 거야”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 꼭붙어 지내던 열두 살 소년 소녀의 깜찍하고 풋풋한 우정으로 시작해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아무 상관없는 존재로 살아가던 12년 후, 그 다음 또 한번의 12년 후 만남까지를 그린다. 그러니까 열두 살, 스물네 살, 서른여섯 살에 이루어진 노라와 해성의 만남과 이별 이야기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줄기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빛과 색, 소리와 대사, 인물과 스토리 모두 매력적인 러브스토리다. 서울과 뉴욕 하늘 아래 공기와, 그 속에 섞이는 노라·해성의 숨결이 스크린에 깃들어 극장 안을 쉽게 채운다. 때론 벅차고 때론 충만하고 때론 애타고 때로는 아득하고 때론 한없이 쓸쓸해지는 감정들. 어떤 인연으로 너와 나는 이 세상에서 만난 것일까. 너와 내가, 그리고 그와 이렇게 만나기까지 전생에선 몇 겁의 인연이 있었을까. 여기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전생의 어떤 업보 때문일까.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면 다음 생에선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까.

영화는 해외의 비평이나 홍보용 문구대로 순수하게 ‘로맨스 드라마’다. 노라와 해성이 영화적 시점으로 ‘지금’일 2024년쯤, 각각 미국인과 한국인으로서 대선과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영화에선 전혀 언급조차 없는 단지 ‘정치적 상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사람을 잇고 있는 인연의 끈만큼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과 한국사회의 ‘정치적 공기’를 상상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동시대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각각 소수자(마이너)와 주류(다수자·메이저)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정체성’에 관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북미 시장부터 공개되면서 세계 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세계의 평단과 객석, 주요 영화제에서의 수상 성과를 이어가며 지난 6일 한국에서도 개봉했다(이하 관람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스물넷, 이제 아무도 그녀를 ‘나영’이라 부르지 않고

그는 군에서 막 제대해 복학했다

미국 독립 영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세계 영화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주요 국제영화제에서도 감독 데뷔작인 독립영화로는 ‘눈부시다’고 할만큼 성공적인 성과를 얻었다. 미국에선 뉴욕비평가협회 신인감독 작품상, 전미영화평론가협회 최우수작품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최우수 작품·감독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 드라마 부문 작품·감독·각본·여우주연·비영어영화상 후보이기도 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됐다.

어렸을 때 헤어졌던 단짝 친구가 궁금하다. 더구나 풋사랑의 이성친구라면 아마 사는 동안 내내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그녀를 찾아본다. 그/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한마디로 ‘오래 잊고 지냈던 풋사랑’를 찾고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패스트 라이브즈’다. 어쩌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거나 들어보았을 매우 흔한 이야기이다.

이미 ‘운명적인 재회’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그 누가 대상이든 ‘구글링’ 몇 번으로 찾아낼 수 있는 디지털 시대다. “지하철 역에서 신문을 사려 돌아섰을 때 (우연히) 너의 모습을 보았다”던 노래(‘시청앞 지하철’, 동물원)는 1990년대니까 가능했다. 헤어진 연인의 근황이 알고 싶으면 페이스북도 좋고 인스타그램도 좋고 몇 분이면 된다. 우연의 마법이 사라진 시대, 닳고 닳아 보이는 이야기를 기시감과 클리셰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인연이라는 동양적 모티브와 정체성에 대한 서사다.

뉴욕에 있는 스물네 살의 노라와 서울에 사는 해성 역시도 12년전의 풋사랑을 만나는데 운명의 끈보다는 디지털 네트워크가 더 가까웠다. 소셜미디어로 서로를 찾고 ‘영상통화’로 재회했다. 그러다 다시 연락이 끊기고 각자의 삶으로 바쁘게 보낸 12년 후 서른여섯 살의 해성은 휴가 여행 차 뉴욕을 찾아 노라로 살아가는 어린 시절의 친구 나영을 만난다.

영화는 열두 살에 헤어졌다가 12년 후 청년이 된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그 방식은 이 영화가 단순히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임을 명확히 해준다. 스물네 살의 해성은 군 복무 중 야외 훈련을 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말하자면 감독은 성인이 된 해성을 소개하며 첫 마디로 “그는 군대를 다녀왔습니다”라고 하는 셈이다. ‘한국남성’이라는 전형성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설정이 있을까.

다음 장면은 복학한 후 대학 친구들과의 술자리다. 같은 친구 너댓명이 항상 등장하는 술집 장면은 이후에도 수차례 나온다. 그 중 해성이 낀 첫 술자리는 한 친구의 실연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친구의 연애담이 빠질 순 없는 노릇. 여자·연애 얘기야말로 남자들간의 우정 혹은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매개가 아닐까. 술에 절어 속쓰린 아침을 깨우는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식탁에서 무심한 듯 말없이 신문을 펼치고 있는 아버지다. 어머니가 내주는 뜨끈한 국 한 사발까지 매우 한국적인 식탁의 풍경이다. 영화는 군대, 대학, 친구, 술자리, 부모와의 아침식사 등으로 스물넷 한국 남자 해성의 정체성을 하나둘씩 구축해간다.

노라는 어떨까. 영화는 뉴욕의 작은 방에 들어와 노트북 컴퓨터를 켜는 장면으로부터 성인이 된 노라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후 어머니와의 영상통화와 동료와의 회의(수업)를 하는 장면 등으로부터 관객은 노라가 극작가이며, 캐나다에 있는 부모님과 떨어져 뉴욕에 거주 중이고, 숙소는 미국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제공된 것이라는 몇 가지 정보를 얻게 된다. 그리고 노라는 첫 영상통화에서 ‘나영’이라고 부르는 해성에게 “이제 여기선 아무도 나를 나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라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자이자 여성이다. 이중 삼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존재다. 노라는 주류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며 인정투쟁을 벌여야 한다. 아마도 노라에겐 인생의 모든 관문이 ‘입국심사’일 것이다. 노라는 20대 후반 극작가인 유대계 미국 남성과 결혼을 해 영주권을 얻게 된다.

노라가 결혼 후 남편과 캐나다의 부모님댁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미국 입국 심사를 받는 장면이 있는데, 직원은 여행 목적과 장소 등 모든 질문을 남편에게만 한다. 아마도 아시아인인 노라가 영어를 못하거나 미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하던 노라는 “두 사람은 어떤 관계냐”라고 묻는 입국심사대 직원의 마지막 질문에 “부부(married)”라고 직접 답한다. 노라가 미국에서 대답할 권리를 얻기 위해선 결혼이 필요했었음을, 결혼조차도 소수자인 노라에겐 사회가 인정하는 정체성을 얻기 위한 인정투쟁의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다.

노라가 정체성을 위해 싸우는 동안, 해성은 주어진 정체성대로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노라는 부모와 떨어진 도시, 홀로 사는 집, 일을 하는 작업실, 동료와 토론하는 장면 속에 있다. 노라에겐 인생의 모든 것이 쟁취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 해성은 부모와 함께 사는 집, 대학 교정, 친구와의 술자리에 있다. 정해진 대로 학교 가고, 군을 다녀오고, 친구와 만나고, 부모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노라는 남편에게 해성을 설명하며, “뼛속까지 한국인”(So Korean)이라고 한다. 그것은 한국인만의 유별난 특징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해성이 주류의 삶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왔다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서른여섯, 야근이 익숙한 해성은 결혼을 고민하고,

유대계 남편과 사는 노라는 토니상을 꿈꾼다

해성과 노라는 마침내 뉴욕에서 만난다.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 만남이었을까. 노라는 해성에게 뉴욕의 여러 곳을 보여주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해성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와 헤어질 위기에 있는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한다. ‘좋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그가 다니는 회사는 어떨까. 다 그렇듯이 야근을 밥먹듯이 하지만 수당은 주지 않는다고 해성은 불평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외국에알려진 한국 기업 문화 이미지를 반영했을 것이다. 그는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지만 결별 위기에 있다는 고백도 한다. 결혼을 해야 하지만, 여자쪽에서 원하는 조건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란다. 자신은 평범한 직장에서 평범한 연봉을 받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기 때문에 결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해성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지만, 한국 관객이라면 능히 짐작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 이 나이 수준의 남녀라면 최소 ‘인서울’, 최대 강남의 자가 30평대 아파트에서의 삶 정도가 해성이 말하는 결혼 조건임을 말이다.

역시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해성은 썩 괜찮은 회사를 다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몸담는 업계의 동향과 주식·코인 시세에 민감할 것이다. 생애 첫 주택마련, 신혼부부 특별공급 같은 부동산 정책에도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과연 야근이 싫고 결혼이 버거운 MZ세대 해성은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노라는 극작가다. 토니상을 꿈꾸는 그녀는 할리우드 작가 파업 때 함께 거리에 나섰을까. 여성으로서 미국의 첨예한 이슈이자 대선 쟁점 중 하나인 ‘낙태권’에 대해선 어떤 입장일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반이민정책에 대해선? 유대계 남편을 둔 그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전쟁에서 과연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할까? 그는 어떤 미국 대통령을 원할까.

한국에 사는 평범한 ‘정해성들’은 오늘도 업무에 지친 하루를 끝내고 친구와 술자리를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안주 삼아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야될지 말지, 주식 포트폴리오엔 엔비디아를 담을지 삼성전자를 담을지, 지금이라도 비트코인 열풍에 올라타야될지 아닐지 설왕설래 하면서 말이다.

셀린 송 감독 스스로가 그러했듯이, 해성을 보낸 노라는 이민자 여성의 삶을 다룬 희곡을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대계 남편과는 이스라엘이 휴전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놓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적 시간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노라와 해성은 ‘정치적 계절’을 맞고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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