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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바지 입어도 된다면서요?" 세종청사는 여전히 ‘긴바지옥’ [김용훈의 먹고사니즘]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SK이노베이션 직원들. 이 회사는 이미 지난 2016년부터 반바지를 허용했다. [연합]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말로는 반바지 입으라고 하죠. 지침은 그대로인데 어떻게 입어요.”

역대급 폭염이 지속되면서 정부세종청사 공무원들 사이에선 “우리도 반바지 좀 입고 일하면 안되냐”는 말이 나옵니다. 지난 3일엔 세종시 외부온도가 41.1도(℃)를 웃도는 등 찌는 듯한 더위에 복장까지 갑갑하다 보니 일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실제 반팔에 반바지를 입으면 체온이 3도에서 4도까지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정부세종청사에 출근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반바지는커녕 이 더위에도 여전히 수트를 고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냉감이 있는 기능성 ‘쿨비즈(노타이 반소매 셔츠 차림)’를 입는 이들도 있지만, 반바지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꿉니다.

지난 8월 3일 정부세종청사가 위치한 세종시 기온이 41.1℃를 기록했다. 사진은 국립세종도서관 내 전자온도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 16일 비공개로 열린 확대 간부회의에서 “복장으로 상대방을 평가하지 말라, 복장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일종의 꼰대스러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업무적 성과만 낼 수 있다면 반바지와 반소매 티셔츠, 심지어는 슬리퍼를 신는 것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말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추 부총리는 솔선수범(?)해 지난 7월 10일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확대간부회의를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에서 가히 파격이란 평가가 나왔습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7월 10일 정부세종청사 기재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확대간부회의’에서 자율화된 복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

중앙부처 뿐 아닙니다. 최근엔 각 지방자치단체 시장들도 여름철 공무원 복장에 대해 한 마디씩 했습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달 MZ세대 공무원 250여명과 만난 자리에서 ‘공무원이 반바지 입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삼성도 반바지 입고 출근한다. 반바지 입고 오든지 팬티 입고 오든지 알아서 하라”고 답했습니다. 이현재 하남시장도 90여명의 MZ세대 공무원들이 참여한 ‘MZ세대 공무원 소통행사’에서 “반바지를 착용해도 좋다”면서 “편한 복장이 업무의 창의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고 하죠.

부총리부터 시장님들까지 ‘반바지’를 허(許)했지만, 아직도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말로는 반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하겠지만, 정말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면 아마 여러 사람이 눈으로 쏘아대는 레이저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총리와 시장들은 ‘입어도 된다’고 해도 명문화 된 ‘공무원 복장 관련 지침’ 상 입을 수 없다고도 합니다. 실제 인사혁신처가 지난 6월 5일 공지한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른 ‘공무원 복장 간소 관련 지침’에 따르면 반바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의 사례로 꼽힙니다.

인사혁신처가 공지한 '공무원 복장 관련 지침'.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 예시에 '반바지'가 포함돼 있다.

앞에서 ‘아’인데 뒤에선 ‘어’인 셈이죠. 실제 인사혁신처는 상의의 경우 노타이 정장, 콤비, 니트, 남방, 셔츠를, 하의는 정장 바지와 면바지 등을 권장 복장으로 제시했습니다. 넥타이도 국회와 공청회 등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매지 않아도 된다고 권고했죠. 하지만 슬리퍼와 반바지, 찢어진 청바지 등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금지된 복장으로 분류했습니다. 한낮 기온이 41도를 웃도는 폭염에도 공무원들이 정장 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세종 공무원 사회는 지금까지도 ‘긴바지옥(긴바지+지옥)’에 빠져 있다”고도 표현합니다.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SK이노베이션 직원들. 이 회사는 이미 지난 2016년부터 반바지를 허용했다. [연합]

민간기업은 어떨까요. 국내 글로벌 대기업들은 일찌감치 ‘반바지’를 허용했습니다. SK그룹은 2000년부터 계열사별로 자율복장제를 시작했고, SK이노베이션 등 계열사는 2016년부터 반바지도 허용했습니다. SK이노베이션 본사에선 ‘부장급’들이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 2016년부터 반바지를 허용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임원까지 그 적용 대상을 확대했습니다. LG그룹도 4년 전부터, 현대차그룹 역시 4년전부터 임직원 자율복장 근무제를 도입했죠. 복장 자율화가 업무효율을 높였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복장 자율화에 대해 찬성합니다. 지난 2020년 인크루트가 ‘사내 복장 자율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시행한 결과, 10명 중 9명은 ‘찬성’했습니다. ‘불필요한 사내 규율이나 관습을 없앨 필요가 있다(36.7%)’, ‘업무효율 상승(33.5%)’, ‘사내 분위기 전환(19.4%)’ 등을 찬성의 이유로 꼽았습니다. 언제쯤이면 정부세종청사에서 반바지를 입은 공무원을 볼 수 있을까요. 하긴, 벌써 25년 전인 1997년 DJ DOC가 ’여름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텐데~’라고 노래했지만, 여전히 반바지 교복조차 흔치 않은 걸 보면 쉽지 않겠죠?

※[김용훈의 먹고사니즘]은 김용훈 기자가 정책 수용자의 입장에서 고용노동·보건복지·환경정책에 대해 논하는 연재물입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아쉬움이나 부족함이 느껴질 때면 언제든 제보(fact0514@heraldcorp.com) 주세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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