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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가치동맹과 미국의 실리주의

역대 최장수 경제사령탑을 역임한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는 3년6개월 재임기간 내내 ‘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하다 올 5월 정권교체와 함께 물러났다. 2018년 말 취임 이후 본격화한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반도체 생산소재 수출 금지 파장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했고, 곧이어 터진 코로나19 사태 극복에 2년여를 보냈다. 국민 재난지원금과 소상공인 지원 등을 위해 역대 최다·최대 추경을 편성했다.

홍 전 부총리가 재난 수습에 몰두하면서도 줄기차게 외치며 추진해온 주제가 있었다. 이른바 혁신성장을 위한 ‘빅 3(BIG 3)’ 산업의 육성이었다. ‘빅 3’란 시스템반도체, 전기·수소차 등 미래차, 바이오헬스 등 향후 우리 경제를 이끌 3대 산업을 말한다. 이를 위해 거의 매주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세제·재정·금융 등 지원정책을 발표했고, 민간투자 촉진을 위한 규제개혁·투자펀드 조성도 추진했다.

정권교체와 함께 용도 폐기된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빅 3 산업 육성책을 꺼낸 것이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이 빅 3 산업은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각국의 반발 속에 국제 규범까지 무시하면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는 3대 전략산업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경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 반도체 생산역량을 강화하는 반도체산업 육성법을 제정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대만이 참여하는 ‘칩 4’ 동맹을 추진해 국내 기업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미래차와 관련해선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해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에 전기차를 수출하는 국가들을 차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바이오삽업도 미국에서 발명된 백신·의약품 등 생명공학제품을 미국에서 생산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의약품 위탁생산업체들에 직격탄을 날렸다.

미 제조업 부흥을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3대 산업 강공 정책은 윤석열 정부가 자유와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가치외교를 내세우며 미국과의 관계를 안보·경제동맹에서 기술동맹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나왔다. 미국이 동맹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는 비난은 이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국내 기업들은 대미 투자 확대계획을 발표하며 코드를 맞추고 있지만 이 정책들이 시행되면 국내 산업 기반이 위축되고 미국은 물론 중국 시장까지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는 미국이 겉으로는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 이해관계와 힘(power)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외교정책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역시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지만, 빅 3 산업정책은 전형적인 반시장적·국가주도적 정책이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외교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이익에 부합하면 독재·폭력정권이라도 옹호·지지해왔던 사례는 차고 넘친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패권경쟁이 가열될수록 이러한 자국 중심주의와 힘에 의한 국제질서는 더욱 강화되고 노골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내세운 가치 중심 외교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국익과 실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다. 실익을 도모하는 대외 경제정책과 외교가 절실해 보인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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