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김성훈의 현장에서] ‘먹튀’를 시대윤리로 삼을 텐가

판사는 뭐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무척 답답해하는 듯 보였다. 선고 전 마지막으로 피고인을 직접 심문하겠다더니, 피고인에게 연방 호통치고 다그쳤다. 판사는 웬만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술 취한 여자친구에게 산낙지를 먹여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고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답했다.

모텔에 단둘이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는 없었다. 여자친구에게 거액의 사망보험에 가입하게 한 점, 사건 직전 수익자를 자신으로 바꾼 점, 보험금 수령 전후 보인 행동들이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살인의 직접 증거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신속히 구호 조치를 취하려고 노력한 정황도 참작해야 했다.

판사는 결국 살인을 무죄로 판단했고, 얼마 뒤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결백하다는 것이 밝혀져서 무죄인 게 아니라 죄를 입증하지 못해 무죄. 뒷맛은 무척이나 찜찜하게 오래 남았다.

10년 전 사건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최근 세간의 화제인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이은해-조현수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거액 보험금이 연관된 데다 불운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고, 현장에 혐의자 외에는 별다른 목격자가 없어 밀실살인 같은 양상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목격자는 피해자 스스로 물에 뛰어든 점 등을 들어 살인은 아닌 것 같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경찰도 무혐의로 처리했을 만큼 죄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사건이 워낙 자극적이라 더 화제가 된 측면이 있지만 최근 이 같은 보험 사기는 우려스러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기 적발 인원은 9만7629명이며, 2017년 이후 5년간 누적 인원은 45만명에 이른다. 중복 인원이 있겠지만 국민 100명 중 한 명꼴로 보험 사기에 가담해 있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면 그 규모는 더 클 것이다. 특히 나라의 미래라고 할 20대에서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사기 치고 걸려봤자 처벌은 미약하고, 처벌해도 범죄수익금은 환수가 잘 되지 않으니 범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보험 사기 문제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 전반에 한 탕 크게 해먹고 튀면 된다는 식의 분위기가 만연해지고 있다. 오스템임플란트 횡령 사건과 이후 강동구청, 계양전기 등에서 연이어 터진 횡령 사건은 사건 그 자체로도 놀라웠지만 해당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댓글에 달린 “제대로 해먹었네” “몇 년 징역 살고 나와 호의호식하겠지” 하는 식의 반응이 다수인 점이 더 걱정됐다. ‘먹튀(먹고 튄다)’로 성공한 사례가 늘어나고, 그 단어가 일상 속에 스며든 사이,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태도를 우리 삶의 윤리로 부지불식간에 새긴 것이 아닌지 말이다.

그래서 새 정부에 당부하고 싶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죗값을 치른다는 것을, 먹튀의 끝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를, 가평 계곡 사건에 대한 처리가 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paq@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