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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는 왜 4천년 동안 계속 장벽을 쌓아왔을까?
프라이 교수, 1만년 문명 속 장벽 탐색
최초의 재국 아카드 성벽부터 로마·
그리스· 만리장성· 트럼프 장벽까지
장벽 거부한 스파르타, 이념 장벽 베를린도

장벽 탄생은 야만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
“문명의 발전은 장벽 덕”,언젠간 무너져
장벽의 양면성에 주목…벽의 폐쇄성이
안전 보장과 교류 촉진, 개방화 이끌어

“장벽의 탄생으로 인간 사회는 저마다 다른 길로 향했다. 자아도취의 시로 향하는 길을 택한 사회가 있었는가 하면 과묵한 군사주의로 향하는 길을 택한 사회도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길은 훨씬 더 많은 다른 길로 이어졌다. 반면에 나머지 길은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이끌었을 뿐이다.”(‘장벽의 문명사’에서)

시리아의 황무지에는 4000년도 넘은 고대 장벽이 폐허로 남아있다. 장벽 서쪽에는 고대 도시와 현대 도시들이 뒤섞여 있고 동쪽으로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다. 메마른 돌들을 두 뼘 정도로 쌓아 놓은 벽은 약 160km에 걸쳐 있다. 이 허술한 장벽이 무엇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장벽 건설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는 556km 구간에 걸쳐 날카로운 철조망이 쳐진 콘크리트 장벽을 쌓았다. 미국·멕시코 국경에도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장벽이 설치되고 있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왜 끊임없이 장벽을 쌓고 있는 걸까?

독보적인 장벽 전문가인 데이비드 프라이 이스턴 코네티컷 주립대 교수는 ‘장벽의 문명사’(민음사)를 통해 황무지 위에 세워진 고대의 장벽에서 유라시아 대초원에 숨겨진 장벽으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모티브가 된 로마 병사들이 제국의 최북단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장벽에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헐리우드 스타들의 낙원 말리부로 종횡하며, 장벽의 인류사회학적 의미를 찾아나선다.

2000년 전 영국 북부에 로마가 세운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발굴된 건 2002년. 저자는 그 유적 발굴에 직접 참여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인류문명과 장벽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장벽 안쪽에는 언제나 문명인이, 장벽 바깥에는 야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장벽의 탄생은 1만 년 전,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선사시대 트란실바니아의 농촌 마을은 주변에 호를 파고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망루를 세웠다. 말하자면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이들은 이 벽을 쌓은 이들의 후예인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최초의 제국 아카드는 성벽을 쌓았지만 고지대 야만인 고티족에 의해 멸망했으며, 이집트 역시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는 통치자의 벽이라는 이름의 방벽을 구축했다. 건조한 남쪽에 설치된 방어시설은 거의 4천년 가까이 유지돼다 아스완댐 때문에 발생한 홍수로 결국 파괴됐다. 이 진흙 벽돌 요새는 한때 250마일 넘게 뻗어 있었고 유목민들을 감시했다.

성벽에 대한 믿음은 서아시아에서도 견고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국가 전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 이야기로 유명한 왕은 세계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바빌론 공중정원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왕국 전체를 완전히 에워싼 장벽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그런가하면 스파르타인들은 성벽을 거부했다. 거의 1만년 동안 이어져온 도시의 전통을 부정한 것이다. 스파르타의 남성들은 성벽 안에서 편히 잠드는 습성을 겁쟁이의 표시로 여겼으며 도시의 성벽을 ‘여성의 처소’와 같다고 비아냥댔다.

스파르타인들의 성벽에 대한 태도는 신성하고 자랑스러움으로 여긴 일반적 인식과 대비된다. 스파르타인들은 문명의 결실이 그들을 유약하게 만든다고 봤다. 이 뿐 아니라 이들은 세련된 도자기 호박과 상아 조각상을 전부 치워버렸고 문명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뿌리쳤다.

반면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대대적인 요새화작업을 시작, 아테네 중심부에서 에게해 연안 항구까지 수마일에 걸친 성벽을 건설했다. 아테네는 성벽 덕에 안전했고,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철학자들이 몰려들고 조각, 건축, 회화, 연극이 번성했다.

“성벽에 둘러싸인 아테네인은 바깥 세계로 열려 있었지만, 스파르타인은 성벽에 둘러싸이지 않고도 갇혀있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개방적으로 살았던 스파르타인들은 일말의 자유도 누리지 못했고, 아테네인들은 성벽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됐다. 장벽의 역설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사람과 진흙으로 지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동의 잔혹함 위에 세워졌다. 로마인들은 “부서지지도 허물어지지도 않는” 장벽을 쌓았다. 오스만 제국의 코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은 1453년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도시를 천년 가까이 지켜냈다.

저자는 새로운 개념의 장벽들도 제시한다. 조지 워싱턴이 사라져 가는 인디언들을 보호하기 위한 내부를 향한 장벽, 체제의 우월성을 놓고 벌인 베를린 장벽 등이다.

장벽이 끼친 영향력에 대해 저자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장벽보다 더 문명 건설에 공헌한 발명품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장벽이 없었다면 오비디우스도, 중국의 학자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도, 그리스의 철학자도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든든한 장벽과 그것을 지키는 전사 덕에 많은 이들이 다양한 길을 갈 수 있었고, 그 길은 문명으로 통했다.

저자는 그 분명한 실례를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를 통해 들려준다.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눈 밖에 나 로마에서 추방, 흑해 연안의 토미스라는 곳으로 접경지역으로 쫒겨가는데, 여느 주민과 마찬가지로 문 밖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문 앞에 적이 있었고, 뱀독을 바른 치명적인 화살이 어디서든 날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과 정원, 연못과 수로, 문학작품 등 로마에서의 생활과 대조를 이룬 이런 풍경은 방벽의 안과 경계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쇠락하는 듯했던 장벽이 놀랍게도 21세기들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며, 테러, 대량 이민, 불법 약물 유입을 막기 위해 전 세계에 새로 세워진 장벽이 70여개에 이른다고 말한다.

문명사 속에서 장벽의 존재와 의미를 살핀 책은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장벽의 문명사/데이비드 프라이 지음, 김지혜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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