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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은 한식의 근본…수시로 장독 열어 세월 담아야 하죠”[문화 플러스-남도 멋·맛·흥]
장흥고씨 양진재 문중 종부 기순도 명인
동짓달엔 메주 끓이고 정월에 장 담그기 시작
좋은 콩·암반수·죽염…370년 씨간장도 탄생
미래세대 아이들에 ‘전통의 맛’ 기억시키려
서울·전라도 전역 공공 급식에 된장도 제공
“우리의 맛 보존하고 보여주는 것이 앞으로 할 일”
양진재 문중 10대 종부이자 한국 전통장 보존 연구회 대표인 기순도 씨는 2008년 제35호 전통식품 명인으로 선정됐다.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5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을 만드는 비법을 이어받아 50년 가까이 우리의 맛을 지키고 있다. [고려전통식품 제공]

1200개의 크고 작은 장독들이 늦가을의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인내의 시간을 견딘다. 장독 하나 하나엔 태어난 날이 무심히 적혀 있다. 2016년 6월 진장(5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 2014년 5월 진장. 장맛은 ‘시간의 길이’와 비례한다. “숙성 기간은 최소 일 년이에요. 이르면 10개월에서 2년까지요.”

종가의 마당에 가지런히 자리 잡은 장독대는 한 폭의 동양화다. 항아리 위엔 작은 돌멩이가 두세 개씩 놓여있다. “된장, 간장, 고추장을 구분하는 방법이에요.(웃음)” 장흥고씨 양진재파의 종부 기순도 명인의 손에선 해마다 콩 2200 가마 분량의 장이 만들어진다. 기순도 명인은 이곳을 50년이 다되도록 지키고 있다. 전남 담양 창평면 깊은 시골, 종가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른다. 장독대 옆 작은 길을 지날 때엔 바람에 실려온 깊은 장내가 동행한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날 종가에서 기 명인을 만나 오랜 장맛의 이야기를 들었다.

▶370년 씨간장이 태어난 종가의 비법=종가에 시집온 것은 1972년이던 스물 넷. 그날부터 기 명인은 장을 담그고, 장이 익어가는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세월을 보냈다. 장 하나로 명인이 된 것은 2008년. 5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을 만드는 비법을 이어받아 전통식품 명인 제35호에 선정됐다.

“장을 담그는 것이 10가지 과정이라면 한 가지만 소홀해도 제대로 된 장맛을 낼 수가 없어요. 장을 만드는 과정은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합니다.”

기 명인은 일 년에 한 번 장을 담근다. 동짓달(음력 11월)이 되면 ‘좋은 콩’으로 메주를 끓이고, 섣달(음력 12월)에 메주를 발효해 정월(음력 1월)에 장을 담그기 시작한다. 50년 가까이 장을 담가오면서 기 명인은 한 해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다. 오래 두고 시간을 견디는 장처럼 묵묵히, 성실히 장 담그는 일을 한다.

“예로부터 장맛을 보면 그 집의 음식 맛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장은 한식의 맛을 내는 근본이에요.”

조금이라도 장맛이 흐트러질까 기 명인은 음력 11월이 되면 시작하는 장 담그기의 첫 작업부터 마음을 쏟는다. “우선 재료가 중요해요. 저희 집에선 원자재를 써요. 콩, 겉보리, 고춧가루가 아닌 고추, 무농약 쌀… 가장 좋은 재료를 선별해요.” 장의 맛을 좌우하는 세 가지는 콩, 소금, 물이다. 이 정직한 식재료가 한 해 먹거리를 좌우한다.

“지역마다 콩 맛이 달라요. 바닷가의 콩이 잘 자라는 편인데, 특히 전라도 콩은 썩지 않아 더 좋은 콩이에요.” ‘밥맛은 물이 좌우하는 것처럼’ 장맛에도 물맛은 빼놓을 수 없다. 기 명인은 160미터 암반수를 사용한다.

“기본 재료를 좋은 걸 사용하니 맛이 없을 수 없다”는데, 비법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항아리 하나당 콩이 두 가마가 들어가 깊은 맛을 내고, 일반 소금이 아닌 죽염을 쓰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고, 담양의 정취를 품은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약 370년을 이어온 씨간장도 이렇게 태어났다.

기 명인의 죽염은 서해안 천일염을 담양의 대나무에 가득 채워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핀 죽염 가마에서 고온으로 굽는다. “굽는 횟수를 반복하면 대나무 성분이 소금 속에 스며들어 단맛과 깊은 맛이 배어나고, 천일염의 불순물들이 제거돼요.” 구울 때마다 색깔이 짙어지는데 이 과정을 3~4일간 아홉 번을 반복하면 쇠처럼 단단한 죽염이 만들어진다. 장을 담그는 죽염은 한 번 구운 죽염과 아홉 번 구운 죽염을 사용한다. 죽염을 맑은 물에 녹여 염도를 맞춰 하루 동안 둔 후 맑게 뜬 상층수를 사용한다.

“예전엔 닭이 새로 낳은 달걀을 소금물에 띄웠어요. 달걀이 반 정도 잠겨 500원 짜리 크기 정도로 빙산처럼 떠오르는데, 그게 딱 맞는 염도예요. 메주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느냐, 기온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염도는 다른데, 서울은 18도 정도에 맞춰야 하지만, 담양에선 20도로 맞춰요.”

간장은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숙성의 정도에 따라 청장, 중간장, 진장 3가지로 나뉜다. 지금이야 대량생산된 간장 하나를 쓴다지만, 음식의 종류에 따라 조리법에 따라 사용하는 간장도 다르다. 청장은 맑은 국과 나물무침, 5년 미만의 중간장은 조림, 불고기, 잡채를 만들 때 쓰면 좋다. 진한 감칠맛의 진장은 전복초 같은 보양식에 어우러진다. “음식마다 사용하는 간장이 다 달라요.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게 아니라 간장으로 간을 하고 국물을 우려야 맛이 사는 거죠. 그래서 간장이 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해요.”

▶장 담그는 것엔 연습이 없다… “장은 곧 한국”=일 년에 한 번 장을 담그며 50년 동안 거르지 않는 일이 있다. “좋은 날을 받는 것이 장 담그는 모든 일의 시작이에요. 길일, 손 없는 날, 말날(음력 11월 12간지 중 오(午)가 들어간 날)에 처음 시작해요.”

기 명인의 딸인 고민견 고려전통식품 부장은 “장 담그기 전엔 목욕 재개하시고, 백설기 떡을 만들어 고사를 지낸 뒤 메주를 끓이는 것부터 시작했다”며 “지난 5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과정을 반복해왔다”고 말했다. 옛날 어르신들은 ‘장이 변하면 우환이 끓는다’며 장을 담그기 전엔 몸가짐, 마음가짐을 돌봤다고 했다. 기 명인도 그저 해오던 대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장을 담글 때는 더 정갈해야 해요. 아무리 하찮은 음식이라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해요. 장을 만들면 수시로 장독을 열어 햇빛을 맞추면서 세월을 담아야 하죠. 내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장을 담가야 장맛을 지킬 수 있어요.”

수십 년을 이어온 일은 물리지도 않는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 받아들이며 올해에도 말날을 받는다.

“50년 가까이 장을 담갔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어요. 햇살을 너무 맞아도 안 되고, 수분이 많아도 안 돼요. 올해는 맛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으로 장을 기다려요. 장을 담그는 데에는 연습이 없어요. 그 해 장이 맛이 없으면 한 해 음식이 맛이 없어요. 그러니 마음을 다해 정성을 들여야죠.”

장을 담그는 것은 시간을 인내하는 일이다. 켜켜이 쌓아온 시간들이 장독 안에 스며 깊은 맛을 낸다.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간장, 된장에 익숙해진 시대에 기 명인의 마당은 시간을 멈춰세운 것처럼 고요하다. “어느 종가나 장을 만든다”고 했지만, 오랜 시간의 비법들은 어느새 잊혀져가는 전통이 되고 있다. ‘전통의 맛’을 지키기 위해 기 명인은 서울과 전라도 전역 공공 급식에 된장을 제공한다. 미래 세대인 아이들에게 ‘우리의 맛’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수백, 수천 개의 장독에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장 하나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 그 안에 담긴 문화가 있는데, 그 맛이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요. 우리 고유의 맛을 보존하고, 한국의 맛을 보여주는 것도 앞으로 해나갈 일이 아닐까 싶어요. 장은 곧 한국이고, 한국의 맛이니까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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