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선 대대로 대여섯 가지 젓갈로 맛을 낸 김치가 특별한 지역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기순도 명인의 김치는 젓갈이 아닌 간장으로 맛을 낸다. 국내외에선 비건 김치로 인기가 높다. [고려전통식품 제공]

2017년 11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엔 숨은 주인공이 있었다. ‘독도 새우’ 못지 않게 화제가 된 건 370년 된 씨간장으로 구운 ‘한우갈비’. 영국 데일리메일에선 “미국보다 오래된 간장이 트럼프의 한국 메뉴에 나왔다”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청와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나이(1946년생)와 같은 장이 있냐는 문의가 왔어요. 비슷한 시기는 있었는데, 그 해에 담근 장은 없었어요. 대신 문중에서 내려오는 씨간장을 보냈죠.” 10대째 내려오는 370년 된 씨간장은 기순도 명인의 ‘보물’과 다름 없다. “어느 종가에나 씨간장은 있지만, 집 밖으로 나간 적은 없어요. 제사나 명절 같은 중요한 날에 쓰면 쓴 만큼 그 해에 담근 가장 좋은 간장을 부어 보관하고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기 명인의 ‘장맛’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다. 장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유산균 열풍’이 전 세계에 몰아치며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기 명인의 장맛에도 세계가 놀랐다. 미쉐린 3스타를 받은 뉴욕 르 베르나댕의 에릭 리퍼트 셰프,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 셰프도 기 명인의 장맛에 반했다.

2018년 프랑스 파리. 글로벌 그룹 방탄소년단의 유럽투어 마지막 일정에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K팝 그룹의 위세를 기회로 삼아 우리 식품을 홍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공연장이었던 파리 아코르호텔 아레나 VIP라운지에선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아미들의 함성 소리에 맞춰 기순도 명인의 장맛을 알리는 자리가 마련됐다.

“호텔 셰프들, 해외 바이어들이 와서 장맛을 보는데, 그 짠 걸 듬뿍 퍼내 맛을 보면서도 짜지도 않은지 맛있다는 이야기만 연발하더라고요. 한국에서도 경험 못한 환영과 반응을 파리에서 받았어요. 낯설어하지 않더라고요. 우리 된장, 간장이 그런 환영을 받은 거죠.”

이미 프랑스의 호텔, 레스토랑, 봉마르셰 백화점 식품관에 기 명인의 전통장이 입점해 있고, 내년 2~3월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에서의 판매를 앞두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아마존에서 한국 식품의 인기가 특히나 높아졌다. 김치, 장 등이 ‘위드 코로나’ 시대의 ‘건강식’으로 떠오르며 그로서리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존에선 발 빠르게 기 명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송치광 고려전통식품 상무는 “한국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 상품화하는 것을 결정했다”며 “현지화로 맛을 바꾸기 보단 우리 것 그대로 선보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셀러 등록도 마친 상태이며, 현지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레시피 영상도 제작했다.

종가의 독특한 비법을 담은 장 요리도 인기다. 남도에선 대대로 대여섯 가지 젓갈로 맛을 낸 김치가 특별한 지역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기 명인의 김치는 보통의 ‘남도 김치’와는 다르다. 기 명인은 “궁중에선 김치를 담글 때 간장을 많이 썼다”며 “요즘은 좋은 간장을 찾을 수 없으니 젓갈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기 명인의 ‘간장 김치’는 맛의 풍미를 내는 젓갈 대신 깊은 맛을 내는 간장을 넣는다. “간장에는 콩 단백질이 녹아 있어 조미료 역할을 해요. 간장을 넣어 김치를 담그면 비린 맛이 아닌 담백한 맛이 나죠.” 전 세계적으로 채식 인구가 많아지고 있는 요즘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간장 김치’는 채식주의자를 위한 김치로도 주목받고 있다. 아삭하고 시원하면서도 감장 고유의 깊은 맛이 김치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젓갈을 꺼리는 아이들이나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 특히 해외에서 ‘비건 김치’로 K-푸드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