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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41 vs 1662년, 서양 보다 220년 빠른 측우기, 국보 승격
‘발명의 날’ 기원 측우기-측우대 3점 늦게나마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강우량 관측 기술 개발에서 서양보다 220년이나 빠르며,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대한민국 측우기, 측우대 등이 늦게나마 국보로 승격됐다. 5월19일 발명의 날은 측우기 발명을 큰 족적으로 평가해 제정된 기념일이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했다고 20일 밝혔다.

측우대에 측우기를 고정시킨 모습

이 3점의 ‘국보’는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보물로 지정되었으므로 멀게는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은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측우기의 경우 1911년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서양에서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 과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으나 제작되지 못했고, 이후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에 의해 1662년 최초로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다.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에 대해서는 1911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지(誌)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 때 세계 유일의 측우기로 보고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되어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공주 측우기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 8월 18일자 기록에 의하면 서운관(書雲觀, 기상관측 기관)에 대(臺)를 설치해 비를 받아 강우량을 측정했다고 하며, 이듬해 1442년 5월 8일에 측정방식이 미진해 다시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의 원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이다. 일제 총독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에 의하면, 1915년 경 국내에 알려진 측우기는 총 5기, 측우대는 총 10기였다고 한다.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되어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되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측우대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농사를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던 당시, 기상(氣像)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가뭄과 홍수 대비를 위한 측우기를 고안하고,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雨量)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는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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