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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최석호 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 한일관계史에서 배울 점

1350년을 전후하여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다. 1380년 이성계 장군은 남원으로 내려간다. 백마를 타고 전장을 휘젓는 왜구 아키바쓰(阿只拔都)를 직접 활을 쏘아 죽인다. 1389년 이성계 장군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다. 8개월 뒤 박위(朴 , ?~1398)에게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왜선 3백 척과 집을 불태우고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온다.

1413년 명나라가 전함 1만 척을 만들어 일본을 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종 이방원은 위기를 느낀다. 1419년 태종은 세종을 통해 대마도 정벌 교서를 내린다.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돌아선 민심을 되찾기 위한 신의 한 수다. 이종무(李從茂, 1360~1425)가 이끄는 정벌군은 적선 중 쓸 만한 20척만 남기고 모두 불사른다. 왜인들은 대마도 훈내곶(訓乃串)에서 항복한다. 대마도 정벌을 통해 명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키지 않았다. 대마도 도주에게 왜구 단속 책임을 맡기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화근을 남겼다.

강경책에 이어서 회유책을 쓰기 시작한다. 세종 8년 1426년 부산포(동구 범일동)·내포(웅천)·염포(울산) 등 삼포를 열어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한다. 3천 명 넘는 왜인들이 삼포에 정착한다. 다이묘의 사자로 들어 온 왜인 사송왜인(使送倭人)과 교역을 목적으로 들어 온 왜인 흥리왜인(興利倭人)은 언제든 왜구로 돌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1510년 우려는 현실이 된다. 왜인들은 삼포에 설치한 왜관(倭館)에서 난동을 부린다. 15일 만에 삼포왜변을 진압한 조선은 왜관을 폐쇄한다. 1512년 제포왜관을 다시 연데 이어서 1521년 부산포왜관을 다시 연다. 1544년 왜인들이 또 다시 사량도에서 난동을 부린다. 제포왜관을 폐쇄하고 부산포왜관 한 곳만 운영한다.

1592년 왜국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다. 임진왜란을 끝낸 뒤 일본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宗義智)를 앞세워 무역항 개설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조선은 사절을 모두 죽인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송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목숨 걸고 매달리는 요구를 무조건 외면할 수도 없었다.

1607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간다.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부산 동구 수정동에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을 설치한다. 1678년 부산 중구 용두산 좌우편 33만 제곱미터 부지로 두모포왜관을 이전하고 초량왜관(草梁倭館)을 설치한다. 조선사람 연인원 120만 명과 쌀 9천 석 그리고 은 6천량을 들여서 4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열었던 당나라 개항장 당인옥부(唐人屋敷)의 10배 규모다. 네덜란드 상인에게 열었던 인공섬 데지마(出島)의 25배 규모다.

평화는 길지 않았다. 1875년 운양호(雲揚號)를 앞세워 강화도를 침략한 일제는 1876년 1월 군함 4척으로 부산에 들어와 무력으로 시위, 그해 9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1877년 1월 부산구조계약서(釜山口租界條約)을 체결하고 초량왜관 일대에 일본조계를 설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양국의 우호선린관계를 증진시켰을 때 이익을 취하는 것은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은 항상 교역항을 열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아베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무기를 앞세워 쳐들어왔던 과거와 달리 경제력을 앞세워 치고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무역항을 개방하든 아니면 통신사를 보내든 회유책은 효과가 없다. 강경책만 효과가 있다. 다만 뒤처리를 어설프게 하면 화근만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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