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프리즘] 국가를 믿지 마세요
요즘 일 얘기를 하려면 변명같은 자기 방어 논리를 먼저 꺼내야 할 때가 많다. “김학의 편들자는 건 아니고요”, “이명박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장자연 사건 묻자는 건 아닌데요”… 일개 소시민에게 전직 법무부 차관이나 대통령이 어떻게 되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키고 싶은 것은 수사나 재판 당사자가 아니라, 원칙과 절차다.

헌법을 한줄로 요약하면 ‘국가를 믿지 말라’가 된다고 생각한다. 헌법 제정권력은 ‘선한 국가’를 부정하고 언제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권력을 쪼개고,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 쪼개진 권력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고, 형벌을 내릴 수 없다. 헌법의 본질은 기본권 보장이고, 3권 분립을 비롯한 통치구조는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권은 착한 사람만 누리는 게 아니다. 선한 사람, 선한 국가를 전제로 한다면 법이 필요할 리 없다.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은 23일 고(故) 장자연 씨 사건에 대한 재수사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사안을 조사하고 있는 조사단 4팀 구성원 6명 중 4명은 발표 3시간만에 “위원회는 어떠한 결정을 한 바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간 혐의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입증할 자료가 마땅치 않다. 증언자를 자처하는 윤지오 씨가 '장 씨에게 누군가 약물을 먹였을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다. 조사단에서 활동했던 박준영 변호사는 윤 씨의 말을 제대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 공개수사를 시작하면 뒤로 무르기가 어렵다. 결론을 정해놓고 수사가 이뤄질 위험도 있다.

특정인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다. ‘당시에는 기소권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자의적인 기준으로 ‘나쁜놈’을 처단하자는 논리다. 범죄자로 의심받는 사람이 ‘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납득하기 힘든 법률이 발의된 적도 있다. 특정 범죄에 대한 무고죄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다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달콤한 말들이다.

하지만 원칙과 절차는 공정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은 개별 사건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과는 다르다. 나쁜‘놈’이든 좋은‘분’이든, 원칙은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구체적인 사례에서 누굴 잡아 가두고 벌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규칙을 바꿔버리면 ‘룰’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따라서 원칙이 특정 사례에 맞춰 변질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반론을 ‘나쁜놈을 봐주자는 것’으로 단정짓고 공격하는 현상을 자주 본다. 진영 논리에 따라 자기 편에서 듣기 좋은 얘길 꺼내는 사람은 ‘의로운 고발자’ 대접을 하지만, 반대로 듣기 싫은 말을 꺼내면 ‘내부에 총질을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정말 나쁜 사람을 벌해야 할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원칙을 말하는 의견을 공격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국회에서 알아서 좋은 법을 제정하고, 원칙과 절차에 따른 통제 없이도 수사와 재판이 공정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다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권력이 선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의심하는 말을 막지 말자. ‘국가는 옳다’라는 믿음을 가졌던 시절이 어땠는지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좌영길 사회섹션 법조팀장  jyg97@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