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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매달리는 영어, 어떻게 권력이 됐을까
미국인 교수가 한글로 쓴 외국어 문화사
세계 주요 언어들의 발생·전파과정 추적
외국어학습, 개인 선택 아닌 권력의 흐름
“디지털시대, AI활용능력이 새 기준 될것”


온 국민이 영어공부에 쏟는 비용과 스트레스까지 계산하면 아마 천문학적인 수치가 나올 듯하다. 왜 영어를 배우는 걸까. 이런 단순한 물음을 무겁게 들여다본 이가 있다. 미국 출신의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거기엔 일종의 권력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19세기 말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부를 과시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웠으며, 20세기에도 영어실력은 사회적 자본 역할을 하고,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위한 필수요소였다.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에서 파우저 교수는 외국어는 여러 문화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드러낸다며, “외국어 학습은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닌 시대에 의해 좌우되며 역사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아놀드 하우저의 유명한 말을 빌어서 표현했다.

“동서고금을 떠나 개인이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권력과 자본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속한 집단, 나아가 사회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즉 어떤 외국어를 배울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권력이 선택하는 방향을 향해 따라가야 한다.”‘(외국어 전파담’에서)

‘외국어 전파담’은 외국어의 탄생과 외국어가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파되어 왔는지, 그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핀 외국어 문화사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저자의 이력 역시 독특하다. 고려대, 서울대에서 강의하고 일본 가고시마 대에서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한 걸 계기로 한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몽골어, 루슈트시드어 까지 동서양과 소멸직전의 언어까지 10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국어 학습은 글을 읽는 데서 시작했다. 문자의 학습은 지배층 진입 및 유지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종교 경전을 읽을 줄 아는 이들에게 권력은 집중됐다. 기독교에서는 라틴의 성경이, 이슬람교에서는 아랍어로 된 쿠란이 그 역할을 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의 지시로 1265년 만들어진 제국의 문자 파스파가 한 예다. 저자는 문자의 탄생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권력자에 의해 탄생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443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든다. 건국한 지 반세기밖에 안 된 국가에서 왕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설명이다.

르세상스 시대에 오면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주의와 무역의 발전에 따라 인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소통능력이 중요해진다. 글이 아닌 말이 주목받고 정식 교육기관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국어 학습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여기에 인쇄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동기가 실용적 목적 뿐만아니라 부유층의 교양의 덕목으로 인식되면서 여성들도 외국어 학습 대열에 끼기 시작한다. 이들이 처음 배운 언어는 이탈리아어였으나 르네상스 후기로 접어들면 프랑스어가 인기어로 부상한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다섯살 무렵부터 프랑스 출신 개신교 원어민 교사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왕실의 여성들과 부유층의 여성들에게 프랑스어 학습은 큰 인기를 끌었다.


수요가 늘면서 최초로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습기관이 16세기 런던에 등장한다. 클라우디우스 홀리밴드라는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프랑스어 학원으로 런던 부유층 상인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신성로마 제국의 붕괴와 근대 유럽의 국가의 탄생은 언어의 문화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국가의 통치수단으로서 국어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전까지 나라의 공식 언어라는 개념은 없었다. 이에 따라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왕조와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국어가 됐다. 상대적인 외국어란 개념도 이 때 생겨났다.

제국주의와 영토확장의 시기에 오면 국어와 외국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침략을 통해 획득한 새로운 영토에 자신들의 언어를 심었다. 이는 통치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편을 만들고 문화적 우월성을 전파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됐다.

저자가 유럽의 언어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문문화권, 일본과 한국의 언어 관계를 밝힌 점도 흥미롭다. 저자는 중국의 한문 문화권에 속해있던 주변의 국가들,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지배계층은 중국의 문헌과 고전을 배우기 위해 한문을 일고 쓸줄 알아야 했다며, 이는 문자 간의 사대현상을 불러오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그 중 일본은 자국의 문자 체계 안에 한자를 포함시키면서 그 영향권에서 일찍 벗어난 반면 한국은 한문의 영향력이 가장 깊고 오래 지속됐다는 해석이다.

일본과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면서 찾아낸 사실들도 흥미롭다. 한 예로 쓰시마 번주가 한일 역관과 상인들에게 한국어와 일본어의 습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쓰시마는 부산의 동래에 소규모의 무역 사무실을 두고 상인들을 파견했는데, 1727년 외국어 교육기관인 통사양성소를 설립. 한국어를 가르쳐 보냈다.

그렇다면 글로벌화, 도시화, 디지털 시대에 세계공용어 영어의 위상은 어떻게 될까? 저자는 21세기 후반에는 모어와 외국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제2언어, 제3언어의 세상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활용능력이 새로운 사회적 자본의 기준이 될 것이란 주장이 눈길을 끈다. 미국인이 한글로 쓴 책이란 사실이 새삼 놀랍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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