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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PAS]소리없이(?) 옮겨진 한성정부 in 서울…‘제자리’가 중요하다

[헤럴드경제TAPAS=윤현종 기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미리 사진을 찾아봤어. 여러 게시물도 봤지. 서울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는데, 이름은 ‘한성정부’라고 하던데…지금은 어디 남아 있는지 말이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직접 가봤어.
그런데... 

사라진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사진=윤현종 기자]

어, 사라졌네? 혹시 잘못왔나 싶어 한참을 헤맸어. 분명히 독립기념관 사이트엔 “현재 경복궁역 7번출구 앞 건널목 한복판”이라고 쓰여있단 말이지!

 
2017년까지 경복궁역 7번 출구에 있었던(좌)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2018년 4월 11일 촬영한 같은 장소(우). 표지석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대체 어디로 간거야??

   교과서에도 있는 ‘한성정부’

흔적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그 전에 한성정부가 뭐였는지 좀 알아보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동아출판 기준)를 봤어.
합쳐서 6~7줄 정도 언급.

“먼저 1919년 3월 연해주 한인들은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했다. 이어 중국 상하이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서울에서는 13도 국민 대표자들이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하는 한성정부를 수립하였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임시정부 관련 내용 [사진=윤현종 기자]

일본 손에 있던 한반도를 비롯, 해외 각지에도 ‘임시정부’가 일어섰는데, 한성정부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
밑에 보니 이렇게도 쓰였네.

“…민족지도자들은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상하이에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음, 뭔가 중요해 보이네…그런데 ‘유적지’는 어디에? 혹시 철거??

   사라진 건 아니고…“제자리”

경복궁역 근처는 서울 종로구. 하지만 유적지를 관리하는 건 서울시.
시청 역사문화재과 담당자에게 물어봤지. 어디 갔냐고.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와 2번 출구 사이로 이전했습니다”

아…그럼 7번출구 옆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출구로 옮겼다는 건데;; 언제?

 “작년에요“

작년 몇 월?

 “11월입니다”

그럼, 왜 이전 했을까?

 “기존 설치된 표석 위치에 오류가 없었는지 계속 점검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계속 자료를 찾아보고 조사를 한 뒤에 가장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위치로 옮기게 됐죠”

소리소문 없이 이사 간 유적지 표석비. 횡단보도를 건너보자.

2017년 11월에 경복궁역 1번출구와 2번출구 사이로 이전한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

찾았다…나름대로 힘들게 찾아서 그런지 반갑더라. 자세히 다가가 봤음.

“한성정부 유적지 - 1919년 3.1운도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취지서를 준비한 곳”

   교과서 내용, 맞을까? 

일단 유적지의 정확한 위치를 다시 찾았으니 안심.
근데, 여기서 체크할 내용이 있어. 우리가 아는 교과서 내용. 100% 맞는걸까? 
사실 학자들 사이엔 논란이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한성정부’ 의 실체가 있었느냐야. 실질적으로 뭔가 대표자들 모임이 있었는지. 논의를 거쳐 결의를 한게 사실로 기록됐는지 등등. 실제 사료를 보고 연구한 논문의 주장은 좀 달라.

1997년, 당시 포항공대 고정휴 교수는 ‘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란 논문에서 한성정부 수립 선포를 위한 ‘국민대회’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고 주장했어. 계획 했던 군중 시위도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

1919년 4월 27일 경성 인사동에서 학생풍의 2~3명이 낭독 중에 발견 압수된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관련 문건. 1990년대 후반부터 이 국민대회는 실패로 끝났으며, 군중시위 또한 사실상 없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진=공훈전자사료관]

이후 다른 학자들 몇몇이 고 교수 연구를 인용하고 보완했어. 
2001년엔 당시 국사편찬위의 정병준 박사가 ‘1919년 이승만의 임정 대통령 자임과 한성정부 법통론’ 논문에서 이렇게 분석했지.
“13도 대표회의와 국민대회는 국민적 합의절차를 강조하기 위한 명분이었지,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도 ‘임시정부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란 논문에서 마찬가지로 평가했어.
“최근 한성정부 관련 연구에서도 밝혀졌듯 1919년 4월 23일 국민대회를 주관했다는 13도 대표대회는 실재하지 않았고 소수 학생의 시위운동으로 끝났다”

또 있어. 한성정부는 공화제 이념조차 명확히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고, 서류상의 ‘페이퍼 정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음.

   유적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여러 주장이 뒤섞여 있지? 교과서엔 몇 줄 뿐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논쟁거리를 던져주는 게 바로 한성정부야. 그만큼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그래서 유적지를 명확히 표시하는 게 중요해. 모든 연구와 검토는 우리가 기억할 ‘실체’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래서_서울시는_밥값했다!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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