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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졸 학력으로 7전8기 ‘법조계 윤리 선생님’
司試 7번 낙방 끝에 법조인의 길… “법조윤리는 도덕개념 아닌 법률과목” 국내 변호사법 최고전문가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장

1963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인재 등용문 역할을 했던 사법시험은 올해가 지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정형근(60·사법연수원 24기)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만큼 어려운 환경을 딛고 법조인이 된 사례도 흔치 않다. 모진 가난 탓에 열아홉에 겨우 중학교를 졸업했고, 7번이나 낙방한 끝에 겨우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사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어머니와 친형을 잃는 슬픔도 겪었다. 어렵게 법조인이 된 정 원장은 사법시험을 대체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길을 택했다. 변호사 2만명 시대에 건강한 법조인을 길러낸다면, 그 자체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19일 서울 경희대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정 원장은 법조계에서 ‘윤리 선생님’ 같은 존재다. 로스쿨 필수 과목인 ‘법조윤리’ 전문가고, 지난해에는 국내 처음으로 변호사법 주석서(註釋書)를 펴냈다. 2014년에는 변호사법 개정에 직접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그가 쓴 법조윤리 저서는 이 분야에서 드물게 7판까지 인쇄됐다.

“학연과 지연 같은 ‘연고의식’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 법조계인 것 같아요. 저는 거기서 오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형근 원장이 걸어온 길
▷1957년 전남 장흥 ▷대입검정고시·경희대 법대(법학박사) ▷사법시험 제34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위원 ▷법무부 변호사제도개선위원회 위원 ▷법조윤리협의회 자문위원 ▷국민권익위원회 청탁금지법 자문위원 ▷사법시험·변호사시험 출제위원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남 강진군 칠량면 시골 출신의 정 원장은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입학과 중학교 진학도 일 년씩 늦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하질 못했다. 변호사가 된 뒤 체감한 지연이나 학연을 중시하는 풍토는 정 원장에겐 너무나 낯설었다.

그는 전관예우로 상징되는 ‘불공정 의심’이야말로 우리나라 법조계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말한다. 정 원장도 사법연수원에서 많은 실무교육을 받았지만, 법조인 윤리에 관해서는 딱 두 시간 강의를 들은 게 다였다.

“재판과 수사는 공정해야 합니다. 수백만, 수천만 원을 받고 사건을 처리하는 변호사는 성실하고 유능하게 일해야 해요. 변호사법은 의뢰인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 원장도 법조인이 사명감만을 중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민의 재산과 신체의 자유를 다루는 업무 특성상 직업윤리가 강조될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서 연고관계를 이용해서 사건을 수임하면 안된다는 규정은 변호사법에만 있어요. 회계사나 세무사도 전문직이지만 그런 규정은 없죠. 의뢰인들은 한 번 소송에 휘말리면 큰 고통을 받고 잠을 못이룹니다. 돈 많은 사람은 거액을 주고 전관 변호사를 찾아지만, 일반 서민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죠. 사적인 관계에 따라 지위와 권한을 남용하지 않는 게 필요한 곳이 법조계입니다.”

법조계 일부에선 ‘법조 윤리가 학교에서 배운다고 될 문제냐’고 의문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흔히 윤리라고 하면 도덕개념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법조윤리는 사람의 심성 변화를 도모하는 과목이 아니에요. 오히려 전형적인 법률 과목이죠. 미국에서는 ‘변호사의 책임법’이라고 할 정도에요.”

정 원장은 법조윤리 교육을 통해 법조인이 어떤 경우에 사건을 맡으면 안 되는지, 변호사가 일을 잘못 처리했을 때 의뢰인에게 어떤 책임을 지는지를 가르친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기존 사법시험 출신보다 직무규범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배웁니다. 물론 실무에서 잘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어요. 실천이 중요한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로스쿨에서 법조윤리가 필수과목이 되면서 변호사와 판사, 검사의 직무규범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진전된 건 사실입니다.”

학교에서 배출되는 법조인들이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최유정 변호사나 진경준 전 검사장, 홍만표 변호사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정 원장이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같은 반 친구가 들고 온 메모지에 ‘광주지방법원’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듣고 보니 삼촌이 법원 공무원이었다. 사소했지만, 학력에 관계없이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말을 전해들은 게 계속 마음에 남았다. 공부를 뒤로 하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닐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을 꿈꾸기도 어려웠다. 진학보다 독학을 결심하고 검정고시부터 준비했지만, 공부는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 휴일, 시험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광주 시내로 나가던 참에 라디오 뉴스가 들렸다. 마침 그날 검정고시가 치러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골에 있다 보니 시험 날짜도 모르고 공부를 하고 있던 셈이었다.

“어차피 대학에 못가는데, 검정고시를 붙어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로 광주에 있는 서점에 가서 다짜고짜 ‘사법시험 준비할 책을 전부 달라’고 했죠. 서점 주인이 ‘누구 책을 주느냐’고 묻었지만, 이제 중학교를 나온 제가 저자가 있는 책을 본 적이 있겠습니까. 아무거나 달라고 해서 책을 싸와선 절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게 2차시험 책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죠.”

산속에서 혼자 하던 공부에 한계를 절감한 그는 딱 스무살이 되던 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왔다. 추운 겨울, 화곡동의 한 독서실에서 총무일을 하며 공부를 병행했다. 잘 곳이 따로 없어 학생들이 귀가하면 의자를 붙이고 잠을 청했다. 그래도 절에서 서울 독서실로 공부 장소를 바꾼 건 많은 도움이 됐다. 마침 그곳에는 휴학 중이던 서울대 법대생이 있었는데, 정 원장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공무원 시험을 먼저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 일단 생활을 안정시키고 공부를 하면 수월하지 않겠냐는 조언이었다. 그는 결국 22살이 되던 해 9급 검찰직 시험에 합격했고, 비로소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뒤로 미뤘던 사법시험을 본격적으로 다시 준비하게 된 건 공무원 생활 2년 만이었다.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였는데, 지검장이었던 분이 법무부 차관으로 발령났어요. 그 때만 해도 보안 문제 때문에 서류 같은 걸 직접 전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차관실에 뭘 갖다줘야 한다고 해서 박스를 하나 들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도착해서 부속실 직원이 포장을 뜯으니 그 안에 골프 신발이 있더라고요. 놔두고 간 물건을 심부름 시킨 거였는데, 요즘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스물 여섯에 그는 사표를 내고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법대 졸업자로 제한할 수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뒤 미리 대비를 한 셈이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28세에 경희대 법대 신입생이 됐다. 하지만 실제 사법시험 응시 자격으로 법대 졸업 자격을 요구된 건 한참 나중인 2000년 이후였다. 긴 수험 생활 끝에 1992년 겨우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누구보다 정 원장의 합격 소식을 바랐던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정 원장은 못했던 공부도 원없이 해 박사학위도 얻었다. 법조인 경력 10년을 보내고 나니 모교에 로스쿨이 생기고, 학자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2007년 로스쿨 개원을 준비하던 학교에서 마침 제가 박사학위를 받은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고등학교 3년을 겪지않아서 그런지 공부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거든요. 연구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자고 결심했습니다.”

2008년부터 교수 경력을 시작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 2010년 한해에는 논문을 9편이나 썼고, 지금까지 전문 서적도 9권을 펴냈다. 그는 이제 실무가를 양성하는 일에 보람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나라 로스쿨이 이제 딱 10년 됐습니다. 잘 정착시켜서 좋은 교육을 해야만 의뢰인들이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를 받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20%정도인 로스쿨 실무 교수진 비중도 더 높여야 해요.”

그는 지금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을 보면 공부를 하겠다며 무작정 절로 들어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 어느 날 그는 배낭에 책을, 어머니는 이불을 짊어지고 산속을 걸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세 번 째에 합격했고, 검정고시를 거쳐 두드린 대학 문은 재수를 거친 끝에 열 수 있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인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도 일곱 번이나 좌절을 맛봤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어려운 환경에 얽메여 지낼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좌절하지 않게 붙들었던 것 같아요. 목표를 정하고 도전한다는 것은 청년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설령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영길 기자/jyg97@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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