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도현정의 현장에서] 금융권 ‘관치 민감증’과 ‘상식 불감증’
“예전부터 ‘빽’으로 은행 들어갔다는 말이 있는 것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닌가봐요”. “은행에 챙겨야 할 우수고객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사람들이 누구 잘 보라고 지나가는 얘기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을 다 비리라고 할 수 있나요”. “배경을 알고 뽑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나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새로운 출입처를 받자 마자 마주치게 된 현안은 채용비리였다. 후진적인 의혹을 받게 된 금융권의 침체된 분위기를 예상하며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돌아온 반응은 너무나 태연했다. 곤혹스러웠다.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금융 당국 고위 관료나 금융사 고위 임원, 우수 고객의 자녀들이 시중은행 채용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사회가 크게 술렁거렸다. 아버지와 친인척, 지인의 말 한 마디로 손쉽게 채용 난관을 뚫은 이들이 있다는 소식은 몇 년째 풀리지 않는 일자리 한파에 떨고 있던 취업준비생들의 마음을 찢어놨다.


며칠 사이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며 퇴진하자 분위기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채용비리 의혹의 배경이 관치금융을 위한 금융당국의 사정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등장했다. 물러난 이 행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있는 ‘서금회’ 출신이였다는 말도 다시 등장했다. 채용비리는 전 정권 인사 솎아내기, 금융권 사정을 위한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정작 채용비리에 대한 논의는 희석됐다.

금감원이 뒤늦게 14개 은행의 채용과정 현장 조사에 나선 것을 두고도 “사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카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뿐”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금융당국도 별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관치’라는 말만 나와도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이들이 정작 비리의혹에는 무덤덤한 모습을 보니, 과연 금융권의 상식이 이 시대의 상식과 같은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12년을 준비해 대입을 치르고, 대학생활 내내 취업을 준비하고도 취업이 어려운 것이 이 시대의 청춘들이다. 지난 1일 KT가 대학생 2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취업준비생들이 자기소개서 1통을 쓰는 데 드는 평균 시간은 7시간, 한 해 지원하는 회사의 수는 20~30곳이었다. 자기소개서 쓰는 시간만 한 해에 200시간 가까이 들인다는 셈이다. 지원 과정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스피치 학원에서 말하기 기술을 배우거나 해외 자원봉사를 나서는 이들도 있다. 이런 ‘스펙’을 쌓는데 들이는 비용은 평균 293만원으로 조사됐다.

사실 금융당국, 국책은행, 금융공공기관, 금융권 고위임원의 자제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 주요 금융기관에서 인턴을 경험을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인터이니까 ’말 한마디‘면 된다고 한다. 이런 ’인턴 경험‘은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 인턴에서 출발해 바로 직원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중국 공산당 간부 자제들을 채용했던 ’고용로비‘ 사건도 있었으니, 어쩌면 ‘선진 로비기법’인 지도 모르겠다.

채용은 기업의 고유권한이다. 문제는 ‘거짓말’이다. 공채 형식을 취하면서 출신이나 배경으로 뽑는 음서제를 적용한다면 지원자들을 기만하는 게 된다. 차라리 ‘공직자아들’ 금융권 고위관계자 친인척 우대’ 또는 ‘우선채용’이라고 공고하는 게 정직할 지 모른다. 이들을 채용해 규제와 감독, 경쟁을 피해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명분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공채라고 공언해놓고 한자리 두자리 쯤은 영업을 위해 ’빽‘에 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상식불감증, 도덕불감증이다.

한 어린 아이에게 꿈을 물으니 “꿈이 재벌 2세인데 아버지가 노력을 안해요”라는 말이 돌아왔다는 유머가 있다. 유머인데도 웃을 수 없다. 아이에게 “얘야, 네 할아버지가 노력을 안했기에 네 아버지도 어쩔 수 없단다”라는 말을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늘도 퇴근후 집에 가면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며, “하늘을 날고 싶다”며 소파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아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아이가 꿈을 이루게 해주려면 NASA나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거액의 연구 기금이라도 내야 하나. 정의가 사라졌다는 절망감을 안은 취업준비생 만큼이나 맨 손으로 시절을 버티는 부모의 마음도 착잡하다. 

kate01@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