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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13. 초행의 리스본 여행자가 가이드 된 사연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밤 버스가 데려다준 곳은 유럽에서 가장 예스러운 수도라고 일컬어진다는 리스본(Lisbon)이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오전 6시쯤 되는 시각이다. 밤새 버스 앞좌석에서 함께 이야기하다 졸다 깨다 온 로스 할머니는 오늘 하루 동행이 되고 싶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Sintra)라는 도시의 친구 집으로 가시는 중이라고 한다. 친구가 일을 마치고 5시쯤 신트라 기차역으로 데리러 온다고 했다며 그 시간 동안 함께 리스본을 다녀보고 싶다고 제안하신다. 어차피 혼자인 나는 흔쾌히 그러기로 한다.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기차역으로 가서 로스 할머니의 짐을 코인라커에 맡긴 후 메트로를 타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나의 숙소를 찾아 아우구스타 거리(Rua Augusta)로 간다. 이곳은 리스본 최대의 번화가임에도 불구하고 머물기 적당한 값싼 호스텔도 있어서 여러모로 좋다. 포르투갈이 호스텔의 천국이라는 말이 맞긴 한가보다.
밤새 버스에서 자면서 달려와서 이른 새벽 도착에, 중심가에 와서 체크인 시각이 안돼서 호스텔에 짐만 맡기고 나오니 오전 8시가 조금 넘는다. 젊은 나도 피곤한데 할머니는 오죽하실까 싶지만 꼬장꼬장한 할머니는 단호히 노 플라블럼이라고 하신다. 아침을 먹자고 하니 빵가게에 들어가 작은 파이 두 개를 사는 걸로 아침은 다 됐다고 하시는 통에 울며 겨자먹기로 나도 그 정도로 아침을 해결한다. 보아하니 경비를 엄청나게 아끼고 계신듯하고 가이드북이나 정보도 많지 않은 듯, 내 가이드북을 보여드리니 너무 좋아하신다.
 

호스텔 근처의 아우구스타 거리를 걷다 보니 코메르 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이 나온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광장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곳은 테주(Tejo) 강을 마주하고 있다. 마치 대서양인 듯 넓은 테주강이 바람이 일렁이는 아침이다. 잠시 강가에 앉아 쉬는데 어디로 갈 거냐고 할머니가 채근하신다. 나도 초행길인데, 리스본에 대한 사전 정보 따위는 없는 태국인 할머니의 가이드가 되어야 할 판이다.
다시 아우구스타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호시우 광장(Praca Rossio)으로 간다. 유럽 서쪽 끝의 이국적인 광장들이 마음을 뺏는다. 로스 할머니는 마치 내가 할머니의 개인 가이드라도 되는 듯 아예 내 얼굴만 쳐다보신다. 할 수 없이 호스텔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할머니를 안내한다.
 

로스 할머니의 여행 방법은 조금 특이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가다가 모르는 게 있으시면 단 일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행인을 불러 세워 물으신다.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니 옆에 있는 나는 불편한데 로스 할머니는 거침이 없다. 잘 모르면 머뭇거리지 않고 속전속결이다. 노인 특유의 어눌함을 그런 식으로 해결하며 여행하시는 거다. 그런 정도의 마음가짐은 있어야 유럽이 처음이신 70세의 태국 할머니가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멜 수 있는 것이다.

워낙 언덕으로 이루어진 리스본이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포르투갈의 상징인 수탉 인형들이 이곳에 리스본임을 알려준다. 아직 오전이라 레스토랑들은 이제 막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을 채비 중이다. 골목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스페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골목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언덕 위에 다다르니 바로크 풍의 성당 앞에 관광객 몇 명이 보인다. 상호케 성당(Igreja de sao Roque)이다. 이번 여행에서 많이도 들렀던 성당이지만 고요한 성당에 들어가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은 언제나 마음을 경건한 긴장감으로 팽팽해진다. 성당을 나와 그 앞 벤치에서 쉬면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한다.

지난밤 버스에서의 피로가 몰려와서 테주 강변으로 향하는 길로 그냥 내려가기로 한다. 리스본의 언덕들을 오르내리는 오래된 노란 트램과 관광객을 태운 빨간 시티투어 버스에 정신이 팔린다. 피곤해도 새로운 풍경은 머릿속에 미지의 세계에 다시 도착했다는 반응을 일으키는 중이다.
강변에 다다르고 나서 보니 아무래도 로스 할머니 표정이 별로다. 언덕을 오르느라 힘드실 거 같아서 괜찮은지 여쭤보면 계속 괜찮다는 할머니 표정이 별로 안 좋아지더니 대뜸 자신이 맨 작은 배낭을 나에게 져보라고 한다. 왜 이러시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다. 캐리어는 역의 코인라커에 두고 왔지만 메고 오신 작은 배낭은 그 크기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할머니의 배낭 속에는 맥북에어가 들어있다. 할머니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조금 놀라고 있는데 노트북을 켜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태국 방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평소에 카우치서핑(Couchsurfing) 호스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은 여행자가 잘 수 있는 소파(couch)를 찾아다니는 것(surfing)을 뜻하는 말로, 현지인은 여행자들을 위해 자신의 카우치를 제공하고 여행자들은 이들이 제공하는 카우치에 머무르는 일종의 여행자 커뮤니티를 말한다.

각국의 여행자들이 할머니의 집에 카우치서핑을 신청했고 지금은 역으로 자신의 집에 방문했던 사람들의 집으로 카우치서핑을 하며 유럽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로스 할머니는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노트북 안에는 그녀의 게스트였던 각국 여행자들이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담겨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는 할머니의 딸과 손녀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다. 방콕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연락처도 잊지 않고 적어주신다.
 

고령의 할머니를 모시고 리스본의 언덕을 오르내렸으니 죄송스러워진다. 할머니 배낭이 그리 무거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자리를 잡고 이야기나 들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마음까지 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의 의사소통은 말이 통해도 어려운 법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테주 강의 바람을 맞으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왔다가 사라지곤 해서 하늘은 하얗다가 파랗다가 한다. 칠십 세라는 나이, 조그만 체구에도 불구하고 세 달간의 유럽여행을 막 시작한 로스 할머니가 다시 보인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한 가족이 눈에 띈다. 바람에 파도치는 강물이 신기해서 장난치는 아이와, 옷이 젖을까 봐 그걸 말리는 아버지의 실랑이, 그리고 그 모습을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 엄마가 있다. 가족의 소소한 행복이 여행자들에게도 전해진다. 파랑새를 찾아 나선 여행에서 돌아온 남매가, 파랑새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는 동화가 떠오른다. 파랑새를 찾아 떠나서 겪는 많은 이야기들이, 가까이에 있던 파랑새를 비로소 알아보게 하는 것이 여행일지도 모른다.
로스 할머니의 말투는 좀 특이하다. 뭘 부탁하는 분위기여도 귀여운 명령조(?)로 들린다. 지나치는 사람에게 할머니와 나의 사진을 부탁할 때도 “너 사진 좀 찍어봐”하는 투다. 나이가 있으시니 사람들이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같다. 이야기가 끝나자 다시 명령조로 말씀하신다.
“배고프니 식당 좀 찾아봐라. 꼭 중국 식당으로 알아봐. 중국 음식이 싸고 맛도 좋아.”

나는 열심히 가이드북을 뒤져 근처의 아르마젠스 두 시아두(Armazens do Chiado)라는 백화점 6층에 중국 레스토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다행히 내가 묶을 호스텔과 가까운 곳이다. 백화점을 찾아 6층에 올라갔지만 중국식당은 없어지고 푸드코트뿐이다. 못마땅한 표정이 할머니 얼굴에 가득하다. 자리에 할머니를 모셔 놓고는 차례 기다려 주문하고 줄 서서 음식까지 받아다가 드린다. 로스 할머니의 진짜 사설 가이드가 된 느낌(?)이다. 어쩌다 리스본까지 와서 태국인 할머니 수발을 들어드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픽 새어 나온다.
늦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기차역으로 돌아가 신트라행 기차를 기다리신다고 한다. 메트로 입구까지 바래다 드리니, 또다시 그 특유의 명령조로 말씀하신다.
“메트로 티켓 어떻게 끊는지 알려줘 봐라.”
포르투갈의 메트로는 안단테 카드라는 메트로용 카드를 구입해서 필요할 때마다 충전해서 쓴다. 보증금을 포함해서 한 번 구입하면 메트로를 탈 때마다 자동화 기계에 넣고 돈을 지불하면 된다. 여태까지는 내가 표를 사서 문제가 안됐는데 이제부턴 혼자 여행하셔야 하니, 이제야 배우시려는 거다. 단번에 설명을 알아듣지는 못하셔도 여러 번 꼼꼼히 방법을 듣고 당신이 도착할 역 이름도 외우시고는 작별의 포옹을 하시고 쿨하게 떠나신다.
 

로스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하루가 휙 지나가 버렸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호스텔에 들어가 체크인을 한다. 8인실의 방엔 두 명의 여행자가 더 들어왔을 뿐 호스텔은 조용하고 쾌적하다. 잠깐 눈을 붙인다. 간 밤 버스에서의 피로와 오늘 리스본의 언덕들을 오르내린 고단함에 금세 깊은 잠에 빠진다.
곤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가 져 있다. 로스 할머니는 무사히 신트라 역으로 가서 친구를 만났을까?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어두워진 거리를 돌아다닌다. 거리의 명품 쇼핑몰이든 테주 강변이든 사람들이 더 모여들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에서 가이드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오늘 이 도시가 처음인데도 왠지 리스본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강도 언덕도 오밀조밀 모여 있는 느낌이 좋다.

낮에 로스 할머니와 바라보던 강물을 어둠 속에서 혼자서 바라본다. 푸른 어스름이 도는 강변의 색채와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다정해 보인다.
낮에 다녀봐서 조금 익숙해진 거리를 더듬어 본다. 커다란 레스토랑 앞 거리에선 제대로 악기를 가져다 놓고 버스킹 하는 사람들의 연주가 울려 퍼진다. 포르투갈이 파두(Fado)라는 한 맺힌 노래의 고향이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흥겨운 가락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고 리듬을 맞추는 손길들이 보인다. 한참을 서서 연주를 듣는다.
슈퍼를 찾는다는 핑계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밤의 산책을 한다. 강변에서 언덕을 오르내리는 푸니쿨라르(Funicular)가 서 있는 풍경도 여행자의 눈에는 이채롭기만 하다.
리스보아(Lisboa)라는 예쁜 지명이 원래 포르투갈식 이름이고, 리스본(Lisbon)은 영어식 발음이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지만, 이 도시는 왠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동행이 되어 주신 로스 할머니가 계셔서 리스본의 첫날이 외롭지 않았다. 방콕에 가게 되면 로스 할머니 댁에 꼭 들르게 될 것 같다. 초행길의 낯선 도시에서 서툰 가이드가 되었던 이 하루는, 리스본을 떠올리면 생각날 추억 하나를 남겨주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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