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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 곡선의 향기를 지닌, 2호선 -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이 2호선이다. 구내에서 전철을 기다릴 때마다, 신선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둘째 딸 아이가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열대어 네온테트라를 몇 마리 사왔다/…새 수족관, 새 물에 적응하려는 저 몸짓처럼/아이는 지금 낯선 조류에 제 몸을 방류하고/온힘 다해 푸른 지느러미를 파닥이고 있다./(문정영)” 시인의 발상만 신선한 것이 아니다. 싱싱한 시들을 수족관 같은 지하철 유리벽에 새겨 넣은 사람들의 서정이 놀라운 것이다.

서울 지하철 노선표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인생을 많이 닮았다. 어디로 가야할까. 어떻게 가면 빠르게 가는 것일까. 어느 노선이건 출발역이 있고 종착역이 있다. 그런데 2호선은 다르다. 돌고 돌아도 종착역이 없는 순환선이다. 어느 방향으로 출발하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고 아차, 깜빡 지나쳐 목적지의 반대 방향이어도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타원형이라 하여 폐쇄된 선이 아니다. 2호선은 1∼9호선까지의 모든 노선이 빠짐없이 닿거나 지나가게 연결되어 있다. 2호선은 언제든지 다른 노선으로 이동할 수 있는 스스로 열린 공간일 뿐만 아니라, 홀로 달리던 각 노선이 다른 노선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공간을 더 확장하는 특이한 노선이다.

우리는 직선처럼 앞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거나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이다. 그래서 1호선처럼 도시 한복판을 가르는 삶을 사는데 뿌듯해하고, 다른 노선들처럼 서울의 중심에 가 닿으려고 서울 언저리에서부터 숨 가쁘게 달려오는 삶을 산다. 하지만 2호선! 둥근 노선의 삶은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해 경쟁적으로 달음박질하는 것이 아니다. 고유한 삶의 목표를 정해놓으면서도 수많은 타인과 상생 관계를 적극적으로 맺는 실천적인 삶을 사는 듯하다. 주체적으로 살면서 열정적으로 세상과 만나는 삶의 형태라고나 할까.

2호선에서 내려, 4호선을 갈아타는 구내에서 또 다른 시를 만났다. “때로는 혼자 사는 삶이/바위를 뚫고 솟아난 소나무처럼 굳건히 보이지만/저 높이서 날아온 태양빛이/저 아래서 올라온 지하수가/저 멀리서 찾아온 한줄기 바람이/친구이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 (강성은/시민 공모작).” 아, 세계 어느 나라가 지하철 구내에 시를 새겨 넣었던가. 이름난 시인도 아니고, 한 평범한 시민의 공모작을 지하철에 아름답게 새겨주는 인류는 더 드물 것이다.

외출 목적지는 라파엘 클리닉이 주관하는 “Tother with Raphael”라는 음악회였다. 서울의대 카톨릭교수회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담한 의료 실태를 천주교인권위로부터 전해 듣고 1977년 4월부터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40여명의 의료진과 100여명의 일반인이 힘을 합하여 외국노동자들을 위해 봉사해 온지 올해로 19번째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국경을 넘어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봉사해온 라파엘 클리닉처럼, 드러나지 않게 지하 세계에서 시의 정서를 만들어온 이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이런 분들을 감히 2호선의 삶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곡선의 향기를 지닌 사람들이라 해도 좋을까. 아, 아름다운 봄날이 아닌가.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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