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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이토록 재기발랄한 실화극… 연극 ‘보도지침’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보도지침(연출 변정주, 극작 오세혁)’은 무거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 이토록 재기발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엘에스엠컴퍼니(대표 이성모)가 제작, 초연한 ‘보도지침’은 실제 있었던 언론계 ‘흑역사’를 소재로 했다. 꼭 30년 전, 제5공화국 시절 언론통제 논란을 부른 ‘보도지침’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6년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 등이 월간 ‘말’지를 통해 정부의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됐고, 1995년 대법원의 무죄 확정 판결이 나면서 9년만에 종결됐다.

기본적인 공간 설정은 법정이다. 사건을 폭로한 기자와 월간 ‘독백’의 발행인이 피고석에 앉고, 검사와 변호사가 날선 법정공방을 펼친다. 


연극 ‘보도지침’의 배우들. [사진제공=벨라뮤즈]

실화를 무겁지 않게 만든 건 연극적인 설정이다. 법정에 선 기자와 발행인, 검사와 변호사가 학창시절 연극반 친구였다는 설정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법정에 선 이들은 어느 순간 학창시절 연극반 동료였던 시절로 ‘플래시백’ 된다. 무대는 법정이자 광장이자 극장이 되면서, 재판이자 토론이자 연극인 이야기를 2시간 동안 숨 쉴 틈 없이 쏟아낸다.

‘보도지침’은 상업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작품성을 갖췄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설정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며 한 순간도 긴장을 놓기 힘들다. 변정주(41) 연출의 힘이다. 변정주는 ‘날보러와요’, ‘넥스트투노멀’을 연출하고 지난해 ‘러브레터’로 제9회 더뮤지컬어워즈 연출상을 수상했다.

감각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의 성찬은 대학로의 젊은 극단 ‘걸판’을 이끄는 연출가 겸 극작가 오세혁(35)의 지분이다. 오세혁은 2011년 ‘아빠들의 소꿉놀이’,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 2편으로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등단, 그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연출가전에서 대상과 연출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서울시극단의 ‘헨리 4세: 왕자와 폴스타프’ 대본도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연극 ‘보도지침’을 있게 만든 건 무엇보다도 엘에스엠컴퍼니의 이성모(35) 대표다. 이 대표는 2010년 엘에스엠을 만들고 뮤지컬 ‘국화꽃향기’, ‘두결한장’, ‘아보카토’, ‘안녕유에프오’ 등을 제작해 왔다.

이 대표는 2014년부터 이 작품을 구상했다. 실제 사건 당시 변론서에 있던 내용도 상당 부분 대본으로 끌어왔다.

사실 연극 ‘보도지침’은 감각적이면서도 날선 연출과 타고난 이야기꾼의 만남, 여기에 무대와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들의 조합으로 개막 전 티켓 오픈 당일 예매율 1위를 달릴 정도로 기대를 모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개막하자마자 곧 논란에 휩싸였다. 이 대표가 ‘보도지침’ 홍보 브로슈어에 작품 제작 계기를 실은 것이 화근이 됐다. “2014년 여름, 세월호 사건으로 침체된 공연계에 20~30대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저가의 가벼운 공연들이 넘쳐날 때, 모든 세대와 성별을 아우를 수 있는 공연을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이 2030 젊은 여성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홍보 브로슈어는 전량 폐기됐지만, 수백장의 티켓 환불 사태가 이어졌다. 이 대표는 즉각 자신의 페이스북과 ‘보도지침’ 공식 계정을 통해 여러차례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보도지침’ 관련 기사나 커뮤니티에선 아직도 비난 댓글이 폭주한다. 평일 객석 뒷쪽은 빈 자리가 휑하다.

이 대표가 ‘보도지침’ 제작 계기를 통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메시지가 있는 연극’이었다.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관객들에게 짜릿함을 줄 수 있는 킬러콘텐츠가 연극에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작품을 만든 계기였다.

이 대표는 “제 자신이 억울하다기 보다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놨다. “정말 치열하게 준비했는데 작품을 만든 모든 분들에게 누가 된 것 같아서”다.

작품 밖의 ‘말’ 때문에 작품 안의 ‘말’이 묻혀버렸지만, 다행인 건 공연 기간이 꽤 길다는 점이다. 오로지 작품 안의 메시지만으로 관객과 화해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보도지침’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 대부분은 여전히 젊은 여성 관객들이다.

더 이상 정부의 ‘보도지침’이 필요없는 시대, 굳이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것이 의미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연극 ‘보도지침’은 더욱 유효하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연극의 마지막 대사로 대신할 수 있다. “몰라서 묻나.”

송용진, 김준원(김주혁 기자 역), 김대현, 안재영(월간 ‘독백’ 발행인 김정배 역), 이명행, 김주완(변호사 황승욱 역) 등 출연. 6월 19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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