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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로 새옷 입은 마산…“골목골목이 환호성이다”
1970~90년대 수출자유지역 근로자 놀터 창동꼬부랑길 벽화마을·세계 3000여종 술박물관상상길 돌바닥에 새긴 2만3000명의 이름… 예술조명 통해 문화예술촌으로 부활 몸짓
1970~90년대 수출자유지역 근로자 놀터 창동
꼬부랑길 벽화마을·세계 3000여종 술박물관
상상길 돌바닥에 새긴 2만3000명의 이름…
예술조명 통해 문화예술촌으로 부활 몸짓



“오데 있소? 7080 그 시절 창동거리 첫 사랑 잊아삐랬소?”

마산이 1988년 정점을 찍은 1970~1990년대 수출자유지역 시절 옛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마산의 번화가였던 창동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문화예술촌으로 거듭나고, 팔용산 돌탑과 봉암수원지도 추억 마케팅을 통해 마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옛 수출자유지역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마산 수출 자유지역은 1970년 조성될 당시 4개 업체로 시작했다가 1973년에는 115개사에 달했고 1974년에는 수출액이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초고속성장을 이어갔다.

1977년 고용 3만명을 돌파하더니 기술집약적 구조로 업그레이드 되던 1980년대까지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86년 수출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1987, 1988년 4만명에 육박하는 고용을 기록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근로자와 그 가족, 관련 서비스업 종사자까지 전성기 마산인구 50만명 중 절반 가까이 수출자유지역에 의존해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시 한일합섬과 한국철강은 전체 고용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고된 근무를 마친 이들은 창동, 오동동, 부림동 거리로 나와 소주한잔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희망을 다졌으며, 첫사랑을 키워갔다. 당시 남녀비율은 40대60으로 여성이 많았다.

‘약속의 땅’ 마산은 그러나 한일합섬 등이 떠나고 산업구조와 지형이 바뀌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고용은 1988년부터 실적은 1989년부터 급격한 쇠퇴기를 맞는다. 근로자 수가 1993년 1만5000명, 2007년 7000명선으로 급감하는 등 마산시민들은 2000년 무렵부터 속절없이 무너지는 도시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서울의 명동거리 처럼 행인이 교차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붐비던 창동거리 골목골목엔 남녀 근로자들의 재잘거림이 사라지고 쓰레기만 쌓여갔다. 공장터에 아파트 건설용 포크레인이 출몰하자, 시민들은 마산의 옛 영광이 흔적 조차 남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아우성을 질러보기도 했지만, 대안은 없었다.

그러기를 10여년.

2011년부터 창동에 뜻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원래 마산은 예향이었다. 꽃의 시인 김춘수, 노산 이은상, 음악가 조두남, 무용의 김혜랑, 조각가 김종영, 문신, ‘고향의 봄’ 이원수, ‘산토끼’의 이일래,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제하, 음악가 반야월, 만화가 방학기, 영화감독 강제규를 배출한 곳이다.

창동과 오동동은 1950~1960년대엔 문화예술의 중심지였고, 1970~1990년대 소비의 메카였다가 도시 침체와 함께 15년 안팎의 공동화(空洞化) 암흑기를 거쳐 5년전부터 다시 문화예술지역으로 부활하기 시작한다.

‘마산예술흔적’은 마산르네상스 시절의 예술을 재조명하고 7080추억거리를 재연한다. ‘에꼴드창동’은 예술인과 예술 상인들이 융화하는 테마예술상업 골목으로, 현재 총 50개 입주시설이 운영 중이다. 12개 체험공방도 있다.

마산에서의 고단했던 공장생활을 거쳐 이제 40~60 줄에 이르러 여유를 찾았을, 그때 그 근로자들이 문화 예술의 옷으로 갈아입은 창동에 편안하게 방문할 만큼, 품위있고 정겹게 꾸몄다. 아트샵 사이사이로 선술집, 노래방이 끼어 있는 것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추억을 모두 공유할 수 있는 놀거리의 생태계쯤으로 봐줄 수 있다. 마산고, 마산상고, 한일실고 등 마산 출신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봤음직한 ’학문당‘ 서점은 아직도 있다.

예술촌과 이어지는 불종거리~부림시장 155m 상상길은 지난해 한국관광공사가 진행했던 ‘당신의 이름을 한국에 새겨보세요’라는 캠페인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땅바닥에 이름이 새겨진 5색 블록은 2만3000개나 된다.

모두 저명인사가 아닌, 한국을 가보고 싶어하는 지구촌 모든 국가의 일반 시민들이다. 데이트족들은 아전인수격으로 ‘쌍쌍길’이라고 부른다. 남편, 자녀와 함께 걸으며, 나만의 7080 추억에 잠길만한 곳이다.

창동과 가까운 추산동 언덕, 마산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 선생의 예술혼을 담은 시민문신미술관이 있다. 우주의 생명의 리드미컬한 운동성을 작품화한 문신은 ‘문화마산’을 건설하는데 매진했다. 미술관을 짓는데 14년 걸려 2008년에야 완성됐다. 옛 공장터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자 허가를 내준 관청에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봉암공단 인근에 있는 세계 3000여종의 술 박물관 ‘굿데이뮤지엄’과 부림동의 창작공예촌, 성호동의 ‘가고파꼬부랑길 벽화마을’도 문화예술로 새옷을 입은 마산의 명물이다.

마산일대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28년 11월에 건립된 봉암수원지는 이제 마산을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산책로가 됐고, 양덕동에서 봉암동 쪽으로 뻗은 팔용산의 1000여기의 돌탑은 나날이 늘어가, 그 시절 그 분들과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창동에 돌아온 노갑선 시인은 “창동이 꿈틀거리고, 골목골목이 환호성이다”라는 시를 골목에 붙였다. 마산이 마산을 거쳐간 가족들에게 외친다. “이제 고마, 응답하소!”라고.

함영훈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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