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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8. 걷고 또 걷고…순례길 오아시스는 ‘맥주’
-까미노 데 산티아고 +7:비아나에서 나바레테까지 22.2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아무래도 본격적인 순례 철이 아니라서 대도시나 조금 유명한 알베르게는 모를까 어딜 가도 사람이 많지는 않다. 일곱 명의 순례자가 함께 자고 일어난 아침,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까미노 오기 전에 참고로 봤던 책에선 여름 성수기에는 알베르게도 인원이 넘쳐서 함께 걷던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경주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펼쳐진다는데, 비수기 까미노는 여유가 넘친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알베르게 문을 나선다. 일찍 일어나서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온종일 밖에서 움직이는 생활이다. 여행을 하면서조차 이른 아침에 움직이지는 않아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이런 생활리듬이 별스럽게 느껴지긴 한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기분이랄까?

오늘도 하늘은 파랗기만 하다. 신발 젖을 걱정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까미노 표지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비아나를 빠져 나온다. 사람들이 사는 시내는 달리 빠져나오는 길엔 옛 흔적이 순례자를 배웅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정겹다. 기분 좋은 발걸음을 차가 다니는 도로를 피해 오솔길로 인도해주는 까미노 표식도 반가운 친구처럼 보인다.


프랑스와 맞닿은 피레네 산맥 서쪽의 나바라(Navarra) 지역은 바스크(Bask)인들이 살고 있다. 바로 지금까지 까미노를 걸어온 스페인의 북동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바스크 만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고수하고 있어 오랫동안 스페인으로부터의 자치 확대를 위해 투쟁을 해왔다. 바스크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그래피티도 거리의 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비의 여파는 아직 남아 물웅덩이가 아직 마르지 못한 길이 있지만 걷다 보면 편한 길도 있고 더 나쁜 길도 출현한다는 걸 이젠 알기에 기꺼이 걸음을 옮긴다.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도 없고 길도 대체로 포장된 길도 많고 평탄해서 오늘은 두툼한 등산화 보다는 내 신발 같은 가벼운 트레킹화가 제격이다. 까미노 들어와서 매일 신발 때문에 고생했는데 걷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나무로 지어진 친환경 육교는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자동차가 휙 지나가버리는 도로를 피해 안전하게 까미노로 안내해 준다.

이제 향하는 곳은 대도시 로그로뇨(Logrono)다. 차도를 걷지 않도록 숲에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인공의 손길일 것이다. 중세의 까미노가 그대로 남기엔 인간의 생활이 너무나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도시가 커지고 물자를 실어 나르려면 큰 도로도 필요하고 그러다 보면 순례자들이 걷던 길이 끊기기도 했을 것이다.



걷다가 마주치는 순례자들과 “부엔 까미노!”하고 인사를 주고받는 일은 서로에게 소박한 응원이 된다. 누군가의 작품인지 모르지만 걷다가 보이는 그래피티만 보여도 누군가 소리 없이 응원해 주는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작은 화분들이 오순도순 모여있고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어느 주택의 마당이 슬슬 지쳐가는 순례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길이 간다. 남의 대문 안의 풍경이지만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왠지 행복할 것 같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 다녀왔을까?


푸엔테데피에드라(Puente de Piedra : 돌다리)를 넘어서 이제 로그로뇨(Logrono)에 들어간다. 까미노 중에서 만나는 몇 안 되는 대도시다. 오전에 로그로뇨에 도착해서 오늘은 대도시를 관통하게 된다. 까미노 지역에 위치해 대도시로 발전했다는 역사처럼 역시 로그로뇨에서는 곳곳에 까미노를 현대적으로 시각화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까미노 방향을 알려주는 바닥의 표지도 색다르게 예쁜 도시다. 빨래가 널려있는 창문이 반갑다. 어딜 가든 이렇게 나부끼는 빨래가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좋다. 어느 건물에 그려진 그림에는 크레덴시알에 받는 도장들이 순례자의 몸에 찍혀 있어 재미있다. 역시 로그로뇨는 까미노의 도시답다.


거의 10km를 걸었으니 이제 막 문을 연 바(Bar)에서 맥주를 주문해서 가지고 나온다. 날씨도 화창하고 기분도 상쾌하니 커피보다 맥주를 마시기로 한다. 사실, 오전 11시도 채 안된 시간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해서 그렇기도 하고 날씨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마른 핑계로 오전에 맥주를 들이켜 본다. 어제 산 과자까지 배낭에서 꺼내 아예 요기도 하고 있는데 이안 할아버지가 걸어오신다.

커피 한잔을 주문해 테이블에 함께 앉은 이안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벌써 네 번째 까미노를 걷는다는 전설의 주인공인 이안도 처음엔 까미노의 존재도 몰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국인인 이안이 젊은 시절 친구와 둘이 고물 자동차를 사서 유럽여행을 다니던 중 이탈리아에서 자동차가 퍼져 버렸다고 한다. 너무 싼 자동차라 고치는 것보다 폐차하는 게 나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자동차를 처분하고도 여행을 계속하고 싶더란다. 돈도 떨어지고 여행은 하고 싶던 차에 누군가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이안이 맨 처음 까미노에 온 이유는 산치아고로의 순례가 아니라, 무전취식으로 여행을 지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거지꼴로 한 번을 걷고 난 후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영국에서 바를 운영한다는 그는 벌써 네 번째 이 길을 걷고 있다.

이안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일어나서 건물 모퉁이를 도는데 조각상들이 보인다. 순례자들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조각이 꼭 우리 모습 그대로여서 웃음이 난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모두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을 것만 같다.


이안 할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자연스레 뒤로 멀어지고 우리는 도시의 분주함 속으로 먼저 들어간다. 아파트를 지나 옷을 껴입고 바쁜 듯 다니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는 현대적인 매장을 지나 까미노가 안내하는 길로 걸어간다. 도심을 스치고 넓은 공원을 가로 지르게 될 무렵, 걱정이 불거진다. 조금씩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규모도 큰 공원이라 화장실이 있겠지 하며 걷지만 사람도 별로 없는 공원에는 건물 역시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만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서 이곳에 화장실이 없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마음은 더 급해진다. 웃긴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들 아까 마신 맥주가 화근이다. 어디 화장실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며 그야말로 미친 듯이 걷는다. 심각한 상황인데 웃겨서 죽을 것 같다.

공원을 다 빠져나와 간신히 들어간 곳은 기아 자동차 대리점이다. 용변이 급한데 다른 건물보다는 단지 한국기업이라는 친숙함 때문에 용기 내서 들어가 사정을 해서 화장실을 쓴다. 그런 사람이 많은 건지 우리가 웃긴 건지, 직원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짓는다. 그리시아스(Grasias :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나 외쳐대고 나오면서, 걷는 중에는 맥주는 절대 안 마실 거라고 다짐한다. 까미노의 기아 자동차 대리점에서의 기억은,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여유를 갖고 걷게 된다. 로그로뇨를 거의 다 빠져 나왔으므로 길도 사람의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호수를 지나 나무 그늘을 걷고 예쁜 풍경을 보며 걷는다. 슬슬 발이 아프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니까 소화도 잘 된다. 몸의 모든 기관들이 호강인데 발만은 죽도록 고생하는 길이다.

봄으로 가는 길목의 까미노는 잡초와,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이 어우러져 있다. 비교적 평탄했던 오늘 까미노 여정의 마지막인 언덕으로 오른다.

라리오하(La Rioja)지역은 스페인 최고의 레드 와인 생산지다. 리오하 와인은 스페인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와인이다. 여름이면 포도를 따먹으면서 걷는다는 3월 초순의 포도밭은 황량하기만 하다. 이제 나바레테가 보인다. 마을에 보여도 한 시간 이상 에둘러 가야 하는 것을 이제는 안다. 멀리서 보이는 바라보면서 근접해 가는 묘미도 알게 되었지만, 눈앞에 목적지가 보일 무렵이 발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나바레테 안내 표지판을 만나고 나니 산후안데아크레(San Juan de Acre) 유적지가 보인다.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12세기에 세워진 순례자 병원의 흔적이다. 모든 게 갖추어진 21세기에도 걷는다는 게 이렇게 힘이 든데 12세기의 순례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이 길을 걸었을까? 이 길에서 병들고 쓰러지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발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걷다가도 광고표지판의 순례자 모습에도 눈길이 간다. 까미노의 화살표에 즉각 반응하고 순례자를 형상화한 그림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있다.

막바지에 느끼는 발의 통증은 보행을 괴로움으로 바꿔 놓는다. 하지만 이 길을 걷는 것은 나의 의지, 내 다리의 일이고 아픔도 내 발이 느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일주일을 걸으면서 머릿속을 가장 많이 채우던 생각은 신발이 젖었느니 발바닥이 아프니 하는 발에 관한 것들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실 견딜 만한 아픔이다. 그랬으니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바레테(Navarrete)의 시립알베르게에 배낭을 풀어 놓는다. 언제나처럼 주방을 둘러본다.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알베르게 주방에는 쌀이나 밀가루, 식용유나 소금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으니 찬장과 냉장고를 체크해 보는 것이다. 나 역시 어딘가에서 그것들을 사서 요리하고 남게 되면 그곳에 남겨둔다. 가격이 싼 것들이기도 하고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남겨두고 와서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것을 이용하는 것이 무언의 약속이기도 하다. 오늘은 신기하게도 신선한 햄버거용 재료가 그대로 남아있다. 어제 지나간 어느 순례자가 남긴 것이다. 까페에서 아르바이트해봤다는 케이가 햄버거 두 개를 뚝딱 만들어서 셋이 나눠 먹는다.

그렇게 요기를 하고 나서 씻고 빨래를 한다. 날씨가 좋은 어제 오늘은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빨래를 말릴 수 있으니 너무 좋다. 빨래까지 마치면 거리로 나간다. 간신히 시에스타 시간 전에 슈퍼에 달려가 저녁거리를 산다. 햄버거를 먹었으니 오늘 저녁은 빵으로 때울 생각이다. 와인이 유명하다는 리오하 지방에 왔으니 리오하 와인도 한 병 사서 돌아온다. 날씨가 맑으니 식당을 겸한 주방에 들어오는 햇빛도 좋다. 이안 할아버지, 랄스, 헤더도 속속들이 도착한다. 식당에 앉아 다이어리 정리도 하고 사진도 다시 보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뮤지션인 랄스는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연필로 그림까지 그리며 일기를 쓰고 있고 이안할아버지는 와인 한 병을 사다가 벌써 드시는 중이다. 저녁을 먹으며 리오하 와인을 맛본다.


식사가 끝나고 어제보다 친해진 사람들이 와인을 나누며 조금씩 시끌벅적해지는 와중에 살짝 도미토리의 침대로 들어온다. 왠지 오늘은 사람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에 장단 맞추는 게 싫다. 조용히 하루를 돌아보고 싶다. 방에 들어가니 옆 침대에 헤더가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 그녀도 이런 시끄러움이 싫다며 소곤소곤 자기 얘기를 한다. 저널리스트인 그녀는 까미노를 걸으면서 순례자들과 인터뷰를 해서 책을 내고 싶다고 한다. 올해 인도에 갈 계획이라며 인도에도 관심이 많아서 서로의 침대에 엎드려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헤더와의 수다도 끝나고 침낭에 몸을 구겨 넣고는 두 다리를 베개 위에 올려놓는다. 지난 일주일간 걸은 길들을 떠올려본다. 그 옛날 순례자들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영생을 얻으려고 걸어간 여정이 바로 까미노데산티아고다. 중세에 신발이나 침낭 같은 장비를 갖추었을 리 만무하다. 발은 까미노가 끝나는 날까지 아플 것이다. 그것은 걷는 자의 숙명이다. 단지 자주 쓰지 않던 두 다리를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을 뿐인데 대체 나는 무엇을 이리도 보채고 있는 것일까? 고요하던 마음에 돌 하나가 던져진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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