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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4. 숨이 헉헉 산티아고 ‘용서의 언덕’…나를 용서하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3: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4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아침을 알리는 노랫소리에 잠이 깬다. 이 알베르게는 아침식사도 제공되는 곳이라 빵에 잼과 버터를 듬뿍 발라 커피와 함께 먹는다. 이 정도면 훌륭한 아침이다. 빈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다 보니 첫 날 함께 걷던 콜롬비아 부부와 함께 앉게 되었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지만 표정은 밝다.

까미노의 세 번째 아침이다. 팜플로나 초입에서 멈췄기 때문에 시내를 관통해서 지나간다. 이른 시각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출근하는 사람의 바쁜 발걸음, 아침의 번잡함이 느껴진다. 일단 나바라 대학을 찾아갔다. 싱그러운 기운이 넘쳐 살랑거리는 캠퍼스의 아침, 내게 저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아득하면서도 그 풋풋한 젊음이 부러워진다.


대학에서 나와 다시 발걸음이 계속된다. 지난 며칠간의 흐린 아침을 보상하듯, 아침햇살이 맑고 포근하다. 걸은 지 사흘째 만난 대도시와 이별한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생동감이 넘치지만 도시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은 빨라진다. 도시 풍경은 역시 감흥이 없는 것이다. 자연의 풍경을 마주하고 걷는 일이 더 매력적이라는 걸 이젠 알아챘기 때문이다.

길을 모를 땐 화살표를 찾는다. 화살표가 눈에 띄지 않으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색을 보고 순례자인 걸 알아채고는 바로 방향을 일러주는 사람도 있다. 


드디어 도심을 벗어난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푸른 들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가야 할 길이 그대로 펼쳐졌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큼 다가가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을 걸어야 한다. 먼발치에서는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평원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또 다시 평원이다. 두 갈래 길이 나오면 까미노 표지석이 있어서 까미노 방향을 알려준다. 걷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나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도 반갑다. 360도로 빙 돌아보아도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고 하늘은 청명한 날이다. 



대체로 경사가 계속 급해지고 오랫동안 오르막길이다. 젖은 신발이라는 화두에서 벗어났지만 나를 괴롭히는 게 또 하나 나타난다. 그것은 어깨 위의 배낭이다. 배낭여행도 꽤 해봤고 특히 까미노에 오기 직전까지 인도며 남미를 돌아다닌 터라 배낭이 복병이 될 줄은 몰랐다.

걸어보니 여행과 순례 길은 차이가 많다. 매시간 걸어서 이동해서 매일 다른 곳에서 잠자는 순례 길에서 짐은 배낭여행 정도의 사치(?)도 필요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매일 갈아입을 생각으로 넣어온 옷가지들, 화장품 몇 개조차 짐이다. 배낭도 무거운 편인데 의지할 스틱도 없으니 언덕을 오를 때마다 낑낑거리게 된다. 평지에선 잘 걷다가도 언덕에 오면 뒤쳐지고 있다. 



멀리만 보이던 풍차가 가까워진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용서의 언덕”이라는 뜻의 페르돈 봉우리(Alto de Perdon)를 향해 걷는다. 마지막 급경사를 오를 동안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심장이 힘차게 박동하고 왕성하게 혈액이 순환하고 온몸의 근육과 내장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걷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풀 향기가 그렇게도 감미로운 건지, 새소리가 저렇게 청아한 건지 온몸의 감각기관이 반응하는 것을 느낀다.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몸의 변화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이런 생명력이 내 안에 약동하고 있었다니 놀라움의 연속이다. 



드디어 페르돈 봉우리, “용서의 언덕”에 올라왔다. 순례자들이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걷는 조형물이 철로 만들어져 있다. 말을 타고 가거나 나귀를 끌거나 조랑말을 타는 사람, 걷는 사람들의 모습 등 순례자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여기에 오른 사람들은 곧장 예술작품에 자신을 감정 이입하게 된다. 관객이 하나 되는 조형물을 만든 아티스트는 대성공이다.

명색이 ‘용서의 언덕’이라 쉬면서 용서할 것이 무엇인가 어쩔 수 없이 되짚게 된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도 모두 나의 것이라는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다른 어떤 존재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오늘의 목적지 푸엔테라레이나까지 남은 여정이 세세하게 표시된 표지판을 훑어보고 내려갈 채비를 한다.

오르던 방향과 반대로 내려가야 해서 일단 까미노 표지부터 찾는다. 앙증맞게 작은 표지석 주위에는 동글동글한 돌들이 아기자기 모여있다. 돌이 왜 많을까 갸우뚱하며 내리막길로 고개를 돌리고 보니 하산하는 길은 가히 신세계(?)다. 내려가는 길이 일부러 트럭으로 실어다 쏟아 부은 것 같은 자갈길이다. 어떻게 이런 자갈길이 있을까 싶지만 그건 초보 순례자의 짧은 소견일 뿐, 이런 길도 있다. 얕은 경험의 깊이로 뭘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말자는 다짐이 절로 든다. 



자갈길을 헤쳐 조심조심 내려가는 중에, 하나 있는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까미노 첫날 만났던 리처드와 케이트다. 리처드가 걷는 것을 싫어해서 한참 뒤쳐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발 빠르게 먼저 페르돈 봉우리에 도착해 있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들은 걷느니 마니 또 티격태격하다가 팜플로나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고 온 것이다. 방법이야 어쨌든 목적지에만 이르면 된다는 게 느긋한 리처드식의 해설이다. 다시 차를 타지 않고 그나마 하산하는 이 자갈길로 접어들었으니 이 부부도 여기부터 적어도 다음 마을까지는 걸어서 갈 것이다. 리처드와 케이트에게는 용서의 언덕은 그냥 페르돈 봉우리일 뿐, 그들이 넘어야 할 용서의 언덕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간신히 경사 급한 자갈길을 내려오니 평지의 흙길로 접어든다. 지압하는 것처럼 아프던 발바닥이 훨씬 편해진다. 흙과 돌만 섞여 있는 이 길이 비단길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경험이란 참 상대적이다. 앞서 걸어가는 네 사람은 영국과 캐나다에서 온 60~70대의 노부부들이다. 평소에도 트레킹을 자주 하시는 듯 걸음걸이도 힘차고 늘 웃으며 다니시는 사람들인데 길에서 자주 만나니 꼭 인사하고 지나가게 된다. 미소를 잃지 않고 까미노를 함께 걷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오늘 감탄했던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 



길이 끝나고 드디어 작은 마을에 들어선다. 사람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을에 있는 바(Bar)가 무척이나 반갑다. 팜플로나 시내를 관통해서 페르돈 봉을 넘어온 두 다리는 쉬고 싶어 하고 목은 음료를 원한다. 아침부터 걷다가 대낮에 바에 앉아 들이키는 맥주 한 잔이 갈증을 씻어준다. 노부부들도 리처드와 케이트도 다시 이곳에서 만난다. 바는 음료나 간단한 식사를 위해서도 들어가지만 걷느라 지친 다리도 쉴 겸, 그리고 무엇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들르게 된다. 속을 비우고 마시는 맥주가 시원하기만 하다. 



오바노스(Obanos)라는 중세풍의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의 길바닥엔 까미노의 상징 조개껍데기가 새겨져 순례자를 안내한다. 고풍스러운 중세에 온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마을이라 유심히 돌아보게 된다. 넓은 마당을 뛰어놀던 하얀 말과 갈색 개가 문 밖의 순례자들을 맞이해 준다. 동물은 원래 좋아하긴 하지만 이 행복해 보이는 녀석들의 호기심이 귀여워서 잠깐 서서 놀아준다.

중세 때 중앙을 견제하는 지방 귀족들의 거처였다는 오바노스 마을에 들어서자 회색 구름이 몰려온다. 잿빛 하늘과 유서 깊은 마을 풍경이 왠지 잘 어울린다. 



오바노스를 빠져나와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걷는다. 드디어 이름도 아름다운 푸엔테라레이나(Puente La Reina : 왕비의 다리)에 도착한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 간신히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푼다. 시작은 늘 창대한데 끝은 언제나 다리 아프고 배고픈 거지꼴이 되고 있다.

이 알베르게에서는 순례자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늦은 시간에 혼자 들어왔던 한국 여자 진까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저녁식사는 3유로씩 갹출해서 맥주 와인 등을 준비하고 이탈리아 사람인 다니엘레가 파스타를 요리해줘서 나누어 먹는다. 피로를 잊을 만큼 유쾌한 저녁시간이 지나간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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