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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중년이여, 아직 당신 가슴에 펄떡이는 야생마 살아있다면…
-한국 초연 40주년 맞은 연극 ‘에쿠우스’


<에쿠우스 (Equus)>

*공연기간 : 2015년 12월 11일~2016년 2월 7일
*장소 :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
*러닝타임 : 총 120분(인터미션 포함)
*관람일시 :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저녁 8시
*캐스팅 : 조재현(마틴 다이사트), 류덕환(알런 스트랑), 남명지(헤스터 살로만), 조창주(프랑크 스트랑), 최희진(도라 스트랑), 이미소(질 메이슨), 너제트(은경균)
*제작 : 극단실험극장, 수현재
*원작 : 피터 쉐퍼 ‘에쿠우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화요일 저녁 7시.

공연 한 시간을 앞두고 극장 매표소 앞 대기 행렬이 줄을 이었다. 칼바람 부는 12월, 대학로 거리는 한산했지만 연극 ‘에쿠우스’ 공연장 앞 열기만큼은 뜨거웠다.

무려 40년이다. 에쿠우스는 1975년 한국 초연 이후 40년 동안 무대에 올려졌지만, 매회 객석은 꽉꽉 들어찼고, 관객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유는 단순하다. 탄탄한 플롯와 극적 전개, 주인공의 내밀한 심리묘사와 스펙타클한 볼거리가 한 데 어우러진 이 연극이 동서고금 인간 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 에쿠우스 사진, 알런 역을 맡은 류덕환. [사진제공=수현재컴퍼니]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에쿠우스의 줄거리는 이렇다.

17세 소년 알런이 말(馬)의 눈을 찌른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헤스터 판사는 알런을 감옥 대신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에게 보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TV 보는 대신 책 읽기를 강요하는 구식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왜곡된 사랑에 짓눌려 온 알런. 다이사트는 이러한 알런과 유대를 형성하며 사건의 전말을 풀어간다. 그는 알런이 신처럼 떠받들었던, 말로 형상화 한 ‘에쿠우스’에 대해 알아가며 무기력했던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알런에게 묘한 동경심마저 갖게 된다.

연극 에쿠우스의 이야기는 일부 관객들에겐 영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그렇다.

에쿠우스는 마초적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눈을 멀게 했던 오이디푸스적인 모티브와, 억눌린 리비도(Llibido)와 거세 불안이라는 프로이트적인 해석이 연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극 에쿠우스에서 다이사트(조재현)와 알런(류덕환)의 대화. [사진제공=수현재컴퍼니]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욕망이 거세된 현대인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묻고, 잃어버린 원시 생명력의 회복을 집요하게 추궁하지만, 극 중 여성의 존재는 ‘도구’이자 매개체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갈등의 원인(남편인 다이사트에게 ‘수년동안 입 한번 맞춰주지 않으면서 벽난로 앞에 고고하게 앉아 고아들을 돌보는’ 잘난 아내)이거나,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기독교를 맹신하며 아들 알런에게 낡아빠진 성경 구절을 강요하는 극성스런 엄마 도라), 갈등을 극대화하는 원인(알런에게 성적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결국 끔찍한 결말에 이르게 하는 여자친구 질)일 뿐이다.

2001년 배우 박정자가 마틴 다이사트가 아닌 유진 다이사트라는 이름으로 여성 다이사트를 연기했던 것도 이러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연극은 매력적이다. 2시간 내내 지루할 틈 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맨다. 특히 너제트를 포함, 7마리의 말이 등장하는 대목은 관객들의 집중도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말로 분한 배우들은 늑골을 활처럼 휜 채 ‘말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무용수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실제 말이 호흡하듯 ‘푸루루루’ 뜨거운 입김을 뱉어낸다.

그 중에서도 백마 너제트의 몸짓이 섬세하다. 때론 암말, 때론 숫말이 돼 소년 알런과 성적, 정신적 교감을 이룬다.

“6년 전 연출을 맡았을 땐 말들의 몸을 만드는 것에 치중했죠. 몸뚱아리는 6년전이 나아요. 그런데 말의 디테일, 특히 알런과의 교감에 있어서는 이번 말들이 훨씬 낫습니다. 너제트를 맡은 은경균의 몸은 말보다 소에 가까워요. 하지만 역대 너제트 중 가장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조재현)

연극 에쿠우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건 고뇌하는 다이사트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어체의 대사를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건 알런이다. 배우의 에너지를 소위 ‘만랩’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이다. 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까지 연기 잘하는 스타 배우들이 이 ‘영광스런’ 배역을 거쳐 갔다. 오죽했으면 배우 조재현(2004년 알런 역, 2009ㆍ2015 다이사트 역)이 “마음은 항상 알런인데, 다이사트 역을 해야 하니 기분이 드럽다”고 우스개소리를 했을 정도다.

연극은 생각만큼 난해하거나 전위적이지 않다. 국내 최초 셰익스피어 전집 완역가인 영문학자인 신정옥 교수의 평을 빌리자면 “전통적인 리얼리즘 위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적인 기법과 전위적인 스타일을 융합시킨” 현대적인 연극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이끄는 다이사트의 대사 역시 직설적이고 설명적이다.

“나는 이 아이를 정상의 세계로 돌려 보내겠소. 다만 살찌우기 위해서 컴컴한 우리에 가둬 키우는 그런 세계 말이요.”

“내게 에쿠우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캄캄한 심연의 동굴에서 나를 부릅니다. 의사로서 일생동안 피해온 질문을 내게 해오는 것입니다. 내게는 그 소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에쿠우스의 소리 말입니다.”

다만 대사들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극 중 완벽한 몰입을 원한다면 전체적인 줄거리는 미리 파악하고 가는 것이 좋다.

에쿠우스는 발화하지 못한 중년의 욕망을 소년의 그것을 통해 이야기한다. 아직 가슴 안에 펄떡이는 야생마가 살아있는, 그대 중년에게 권한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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