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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포럼-이경준] 뮤지션에게 더 많은 음식을 허하라
상복을 입은 세 뮤지션이 자신의 음반이 든 관을 운구한다. 탐미적 아방가르드도 아니고 관심에 목마른 것도 아니다. 행렬엔 죽음의 기운이 감돈다. 감히 아름다움을 논하는 이는 없다. 이들이 외치는 건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게 밥과 반찬, 잠자리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을까. 여기 궁핍을 넘어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있다. 21세기에 과연 그런 사람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많은 뮤지션들의 처지가 그렇다. 퍼포먼스를 행한 인디 밴드 찰리키튼은 행사의 제목을 “예술가여, 자살을 권장합니다”라 호명했다. 이 땅에서 음악가의 일상은 세간의 저 덧없는 수사들을 쉽게 건너뛴다. 그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0.36원이다. 노래 한 곡에 대한 스트리밍으로 뮤지션들이 받는 금액이다. 이론적으로 유저들이 1000번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면, 뮤지션의 통장에 360원이 입금된다는 이야기다. 최저시급은 5580원이라는 정부발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예술가의 노동을 물리적인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은 모순이겠지만, 그걸 감안하고 계산해도 터무니없는 금액이긴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의 노동은 쓰레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체 또한 쓰레기가 되었다. 다른 일을 택하거나 팔릴 만한 음반을 내면 되지 않느냐고? 이건 개인의 자유의지 차원이 아닌 구조적인 층위에 놓인 문제다. 결함이 있는 건 예술가에게 ‘강요된 선택’을 요구하는 수익분배 시스템 자체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굴욕적인 예술가가 되거나, 시스템을 차버리고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당하거나. 예술가들의 선택은 항상 나쁘거나 더 나쁘다.

더 나쁜 집단은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송사들이다. <언프리티 랩스타>나 <슈가맨>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내건 기획의도 이면에는 음원 발매를 통한 이익획득이라는 진짜 목표가 숨어 있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방송사가 곧 기획사가 되는데, 그들은 현 분배구조상 최고 84%에 달하는 음원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뮤지션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안 막강한 권력을 앞세운 거대자본의 몸집은 더욱 커지고 있는 셈이다. 비대해진 자본은 마음대로 노골적인 이익창출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해 없이 유동하며 새로운 수익모델을 탐색할 것이다. 브레이크는 애초부터 없었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다는 의미다. 이제 어떤 뮤지션이 음원수익을 통해 건물을 샀다는 일화로 하루하루를 걱정해야 하는 음악가들을 설득하려는 건 <기네스북>에나 나올 이례적 사례를 일반화하려는 헛된 희망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고로 나는 뮤지션의 정신력이나 열정 같은 것들을 운운하는 몇몇 사람들은 문제의 선후관계를 잘못 파악했다고 본다. 위장이 영혼에 있는 예술가는 없을 것이므로. 같은 맥락에서 과거 음악인들의 높은 자의식과 자질을 거론하며 현재 뮤지션들의 음악을 폄하하는 것도 올바른 비판은 아니리라. 고뇌에 찬 예술가연하며 소음공해를 유발하는 홍대 바닥의 저 모든 버스커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를 때 그놈의 진심이, 열정이, 자의식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배가 고파본 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음악가들에게 더 많은 음식을 허하는 것이다. 아사를 방조하는 사회만큼 무시무시한 괴물은 없다. 예술이란 기본권 충족 이후에 비로소 가능한 무엇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술가에 대한 처우 문제란 아주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던 고루한 사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5년 한국에서 그 문제는 더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쟁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어떤 출발선 위에 위태롭게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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