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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포럼 - 이명숙] 사람을 살리는 재판과 죽이는 재판

십여년 전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암에 걸려 항암치료 중이던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항암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에 따른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는 소송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재판 때마다 “재산을 나눠받기 전에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어요”라고 말하던 부인의 상태를 전해들은 당시 재판장 정승원 부장판사는 급히 남편과 양쪽 소송대리인을 불러 조정을 시도했다. 

“살아 남은 우리가 돌아가실 분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정 부장판사의 간곡한 설득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합의가 어렵게 어렵게 성립됐다. 아들과 딸의 통장에 재산분할된 돈이 입금되던 날, 기적처럼 부인이 보름여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병원을 찾아 간 필자에게 그는 “감사해요, 변호사님”이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족들과도 마지막 작별인사를 마친 뒤, 몇시간 뒤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 부장판사의 조정은 죽어가던 부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고, 살아 남은 주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의 빚을 덜어준 것이었다. 여기에 마지막 인사로 삶을 마감하게 해 줬던 그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조정’이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말기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부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상대로 “항암치료비를 달라”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이혼판결과 재산분할이 이뤄졌지만, 시한부인 아내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싶지 않은 남편의 항소로 항소심 재판에 들어갔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남편이 과거 정신병증세가 있었는지 여부를 입증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판을 연기하고 시간만 끌었다. 결국 정신병 증세는 감정도 못한채 1심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는 상태로 이혼청구 자체를 기각시켰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부인에게 있어, 남편이 과거 정신병 증세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느라 1년 이상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명줄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은 두 부인 모두 마찬가지였을텐데 극단적인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억울해서 못 죽겠다’는 환자에 대해 의사들은 단 하루, 한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두번째 재판부처럼 황당한 재판 진행과 선고가 일어날 경우 사실상 사법살인에 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정신질환자와 그 소송대리인에게 이끌려 1년 이상 시간을 허비한 것은 하루하루가 생명의 전부인 말기암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독약과 같다. 재판부라는 이름만으로 말기암 환자의 마지막 남은 삶을 이토록 오랜 기간 처참하게 고통을 가하며 짓밟아도 되는 것일까. 하루라도 빨리 판결을 내서 환자가 불필요한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가정법원은 법의 잣대나 진위 판정도 중요하지만, 상처 받은 부부와 가정을 치유하고 봉합해주면서 서로간의 양보와 원만한 해결을 이끌어내는 재판부의 마음 씀씀이가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지나치게 고압적인 ‘원님재판’을 하거나 필요 이상의 부적절한 입증을 강요하고, 당사자 주장에 끌려다니며 시간만 끌어서는 가사사건을 담당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교한 재산분할 계산에만 몰두해 있는 재판부보다는, 당사자의 아픔과 속사정까지 아우를 수 있는 덕망과 원만한 인품을 갖춘 정 부장판사 같은 분들이 그립다.


<이명숙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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