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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예술과 상품은 무엇이 다른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 시작된 예술의 탈선(?)이 앤디 워홀 이후 공장식 복제를 통해 일상과의 경계가 사라진 마당에 새삼 예술과 상품의 차이를 따진다는 것은 생뚱맞을 정도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미학자 아서 단토라면 다르다. 2013년 타계한 단토는 마지막까지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예술을 열린 개념으로 정리한 것과 달리 단토는 예술을 닫힌 개념으로 봤다.

‘무엇이 예술인가’(은행나무)는 2013년에 발간된 단토의 유작이다. 단토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50년 전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던 ‘브릴로 상자’를 다시 꺼내든다. 앤디 워홀의 오브제 ‘브릴로 상자’(1964년 작)는 ’브릴로‘ 비누 세제를 운반하기 위한 포장 상자를 그린 작품으로 이는 외관상 실제 포장상자와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설명=“예술을 그토록 강력하게 만드는 힘은 애초에 그것을 예술로 만드는 요인에서 나온다.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깊이 감동시키는 것은 예술이 유일무이하다.”(‘무엇이 예술인가’ 중)


단토는 한 물체를 예술작품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아름다움처럼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각적인 것과 무관한 존재론적인 특질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단토가 예술의 결정적 특질로 삼은 것은 ‘구현된 의미’이다. 흔히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미적 특질을 떠나 한 작품 안에 어떤 의미가 작가의 손에 의해 구현된다면 그것이 곧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단토는 이 예술의 본질이 어느 시대, 공간에서나 일관되게 통했음을 설명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 벽화나 피에로의 델라 프란체스카, 푸생으로부터 마네, 뒤샹, 워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쟝르를 끌어와 설명한다. 또한 플라톤의 모방개념에서부터 데카르트, 칸트, 헤겔, 하이데거 철학까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 코로 엮어내며 예술의 본질을 규명해 나간다.

‘브릴로 상자’로 돌아오면, 브릴로 세제를 운반하기 위한 판지 상자와 그걸 똑같이 스텐실한 엔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무엇이 다를까. 단토는 앤디 워홀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인 특질을 찾아낸다. 그건 당시 대중의 삶을 박제하려 한 앤디 워홀의 시선이다. 워홀이 부여하려 한 의미와 그 의미가 구현된 것, 이것이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철학적 특징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 벽화의 복원작업에 대한 단토의 견해도 의미에 집중한다. 복원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 주로 선명도와 색채에 치중한 것과 달리 단토는 미켈란젤로가 전하려 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즉 하느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술 취한 노아’에 이르는 9개의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선택받은 인간 노아의 타락한 모습이다. 말하자면 술취한 벌거벗은 노아는 ‘제2의 이브’인 셈이다. 술취한 노아는 나체상태로 몸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창세기에서 노출은 파괴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노아의 성기를 본 아들 함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된다. 함이 노아의 나체를 본 탓에 이 세상에 불평등이 생겨나고 그 결과 정치가 인간의 삶에 들어온다. 술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는 인간의 뿌리깊은 나약함을 보여주며 오직 구원의 기적만이 우리에게 부여된 본질적인 죄악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창조로 시작한 이야기는 신이 육신을 갖고 태어났다가 다시 부활하여 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결말로 끝나는 것이다. 단토는 이 이야기에 요체가 있다고 봤다.

단토는 사진의 발명이 어떻게 예술의 본질을 가르는데 기여했는지도 들려준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릴 것을 주문받던 회화는 사진과의 우열을 가릴 수 밖에 없게 되고 다른 무엇을 드러낼 수 밖에 없게 된다. 아예 상품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팝아트에 이르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결국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예술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게 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사람들은 그 너머 작가의 의도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단토의 이런 의미부여론은 칸트의 예술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판단에 대해 취향의 ‘아름다움’과 무관한 ‘정신’을 이야기한다. 기교적으로 완벽한 도메니키노의 그림은 아름답지만 지금 그다지 찬미되지 않는 반면 추하기까지 한 현대미술도 시대적인 맥락에서 빼어난 착상을 가졌다면 칸트의 관점에서는 충분한 예술작품이 된다.

단토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브릴로 상자’로 돌아온다, 레디메이드 뒤샹과 워홀 이후 미학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브릴로 포장 상자’와 ‘브릴로 상자’가 지각적으로 같다고 해서 존재론적으로 즉, 철학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라고 단토는 강조한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미술을 대하는 미학은 이제 아름다움을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 의미를 따지는 것이 된다. 바로 단토가 말하는 미래의 미학의 모습이다

이 책은 단토의 일생의 논의들을 간명하게 한 권의 책으로 응축한 거장의 엑기스라 할 만하다. 미술작품 도판을 함께 실어 현대미술을 어려워 하는 이들을 위한 현대미술 입문서로도 제격이다.



무엇이 예술인가/아서 단토 지음, 김한영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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