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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세상을 바꾼 모방…‘대박’ 트위커 부호들
[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김현일 기자]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끈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이들과 함께 3대 거장으로 거론되는 라파엘로는 앞선 두 화가들의 구도와 기법을 따라한 ‘모방형 화가’였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후대 미술사학자들로부터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선배 화가들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종합해 자신만의 화풍으로 승화시킨 결과,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능가하는 작품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라파엘로의 ‘창조적 모방’은 산업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공식이다. 모방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현대의 라파엘로들은 이제 부까지 거머쥐며 억만장자 자리에 앉아 있다. 이들은 이미 있던 것을 잘 가공하고 편집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트위커(Tweaker) 부호’이기도 하다.


▶브라질에서 영감 얻은 샘 월튼의 월마트=미국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Sam Waltonㆍ1992년 사망)은 그의 자서전 ‘샘 월튼 : 메이드 인 아메리카, 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한 일의 대부분은 남이 한 일을 모방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샘 월튼은 1962년 월마트를 세웠다. 후발주자로 뛰어든 그는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세계 곳곳의 할인점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날 만큼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월마트의 브랜드 중 하나인 ‘하이퍼마트(Hypermart)’도 그가 브라질에서 본 까르푸를 모방해 1987년 만든 것이다. 월튼은 자서전에서 “당시 유럽 등지에선 이미 식품과 일반 제품들을 한데 모아놓고 파는 하이퍼마켓(대형 할인매장) 형태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며 이를 미국에 들여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의 예측대로 대형 할인매장은 이후 20여년간 월마트의 성장을 견인한 효자 브랜드가 됐다.

그러나 월튼이 단순히 베끼기에만 치중했다면 월마트는 영원히 2등에 머물렀을 것이다. 월튼은 모방과 동시에 그것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혁신을 꾀했다. 바코드 기술이 대표적인 예다. 바코드 기술을 식료품 업계로부터 들여왔지만 월마트는 단순히 상품가격 확인에만 사용하지 않고, 고객들의 구매 유형을 분석하는 데까지 활용했다.

모방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회사의 장점을 적극 수용하고, 혁신의 노력까지 기울이면서 월튼은 월마트를 세계 최대의 유통 공룡으로 키워냈다. 그의 며느리 크리스티(자산 417억 달러)와 아들 짐(406억 달러), 롭슨(391억 달러) 그리고 딸 앨리스(394억 달러)까지 월튼가 4인방의 자산합계만 1608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78조원에 달한다. 창조적 모방이라는 전략으로 오히려 경쟁자를 뛰어넘은 샘 월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악어 잡은 랄프 로렌의 폴로 셔츠=‘폴로 셔츠’는 칼라가 있는 반팔 티셔츠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사실 ‘폴로’는 69억 달러(약 7조63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미국의 디자이너 랄프 로렌(Ralph Laurenㆍ75)이 만든 브랜드 이름이다. 그만큼 폴로 셔츠는 랄프 로렌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제품이 됐다.

하지만 이 폴로 셔츠도 ‘원조’는 따로 있다. 바로 1960년대 라코스테가 선보인 ‘피케 셔츠’다. 피케(Pique)는 프랑스어로 면직물을 뜻한다. 1930년대 프랑스 출신의 테니스 챔피언 르네 라코스테(René Lacoste)가 직접 고안해 경기 중 입었던 반팔 셔츠가 피케 셔츠의 출발이다. 라코스테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해 제품을 내놨다. 그러나 라코스테가 선보인 피케 셔츠는 색상이 세 가지밖에 안 됐고, 소재도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이었다.

랄프 로렌은 이 점에 착안해 1972년 기존의 피케 셔츠에 변형을 준 폴로 셔츠를 새롭게 선보인다. 면으로 된 폴로 셔츠는 색상이 24가지에 달해 피케 셔츠보다 다양성을 꾀했다. 셔츠의 왼쪽 가슴 부분에 폴로 경기를 하는 선수의 모습이 새겨진 엠블렘은 폴로 셔츠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이것도 라코스테가 먼저 시도했던 아이디어였다.

승부욕이 강했던 라코스테는 테니스 팬들로부터 ‘한번 물면 절대 먹이를 놓지 않는 악어’로 불렸다. 라코스테는 친구가 그려준 악어 그림을 자신의 모든 피케 셔츠에 새겨 넣었고, 이것이 지금의 라코스테 특유의 로고가 됐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랄프 로렌의 폴로 셔츠가 누구나 꼭 한 장쯤 소장해야 할 아이템이 되면서 라코스테의 피케 셔츠의 인기를 능가하게 됐다. 이처럼 로렌은 기존의 것에 새로움을 부여한 폴로 셔츠로 자신의 브랜드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디자인으로 혁신한 제임스 다이슨의 가전왕국=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ㆍ68)은 청소기와 선풍기 같은 평범한 가전제품 부문에서 디자인으로 파괴적 혁신을 꾀했다. 그는 영국의 왕립 미술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 출신이다.

제임스의 혁신은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에서 비롯됐다. 진공청소기의 먼지봉투에 먼지가 찰 때마다 자주 막히고, 흡입력도 떨어지는 지경이 되자 제임스는 1993년 회사를 세우고 결국 최초로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를 개발해냈다. 게다가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 먼지를 받아내는 용기를 투명하게 제작한 것도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존의 것을 비트는 제임스만의 이 같은 재주는 선풍기에서도 발휘됐다. 아이들이 손가락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한 날개없는 선풍기로 제임스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명성과 함께 가전제품 CEO로서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의 현재 자산은 48억 달러(약 5조3100억원)다.

‘좋은 예술가는 그대로 복사(copy)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도용(steal)한다’는 피카소의 말처럼 창조적 모방가들은 그대로 베끼기보다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더 좋은 제품을 세상에 내놨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돈을 번 이들을 베꼈다고 비난하는 이들은 없다.

트래비스 칼라닉 우버 창업자나 브라이언 체스키 에어비앤비 창업자처럼 기존에 있던 것을 편집, 가공해 새로운 것을 내놓는 창조적 모방가들은 지금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줄줄이 억만장자에도 오르면서, 이제 창조적 모방은 오늘날 부자가 되는 새로운 공식이 됐다.

*트위커(tweaker)=‘비틀다’ 혹은 ‘수정하다’는 뜻의 ‘tweak’에서 파생된 용어. 각종 신조어와 속어를 정리해놓은 ‘어반 딕셔너리’는 트위커에 대해 ‘컴퓨터ㆍ소프트웨어ㆍ자동차 등의 제품을 미세하게 개량해낸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지난 2011년 스티브 잡스 전기에서 잡스에 대해 ‘기존 제품을 적절하게 개량해 적용한 트위커였다’고 지칭한 바 있다.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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