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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창 기자의 세상읽기> 삐라의 추억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이 카운트다운에 들었습니다. 19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열 엿새 동안 펼쳐지는 아시아 스포츠제전입니다. 때맞춰 북한 선수단 본대가 16일 입국해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런 때 북한이 우리 측에 대북전단(삐라) 살포 중단을 요구해왔습니다. 북한의 국방위원회가 청와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온 겁니다. 북한은 남측이 삐라 살포를 중단해야 대화의 문이 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측이 제안한 남북 고위급 접촉이나 개성공단 남북공동운영위 3통(통행·통신·통관) 회의 등을 의미합니다.

삐라, 참으로 이상야릇한 느낌이 묻어납니다. 삐라는 선전이나 광고 또는 선동하는 글이 담긴 종이쪽지로 전단(傳單)의 잘못된 표기로 북한에서도 통용된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단, 광고, 포스터의 뜻인 영어 ‘bill’에서 파생된 말로, 계산서 역시 bill입니다.
탈북자 단체 등 일부 보수진영의 대북 삐라 살포현장(경기도 파주 일원)


북한이 열 받은 그 삐라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남한의 일부 보수 및 탈북단체들이 경기도 북부 접경지역에서 거대한 풍선에 담아 북에 보내는 그 전단지를 말합니다. 북측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최고존엄’에 대한 모독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고 보니 삐라에 대한 추억이 새롭습니다. 북에서 온 삐라 말입니다. 70년대 초중반 때의 일입니다. 기자의 연배나 10년 전후 선후배들이 소년소녀 시절입니다. 건너 마을 길모퉁이에서도, 동구 밖 언덕 빼기에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던 들판 길섶에서도, 읍내 장터 후미진 국수집 담벼락 틈새에서도 꼬박꼬박 그 삐라는 눈에 띄었습니다. 바람에 실려? 아니면 고정간첩의 소행? 아무튼 도회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워낙 보는 눈이 많아서 금방 사라질 뿐 서울 남산오름길에서도, 무교동 추어탕집 앞에서도, 동대문야구장 근처에도 가로수 잎처럼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삐라의 속성일까요. 울긋불긋한 색감에 무섭게 새겨진 붉은 글자체로 섬뜩한 것이 날이 갈수록 친숙해진 겁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삐라줍기 운동, 아니 삐라줍기 경진대회 때문일 겁니다. 많이 주워오면 칭찬세례에다 연필과 공책까지 공짜로 생기니 숙제도 제쳐놓고 친구 녀석들과 코에 단내가 날 정도로 산과 들을 뛰어다녔습니다. 예상 밖으로 성과가 좋은 날이면 싱글벙글 십 원짜리 세뱃돈 이상으로 고이고이 펴 책갈피에 꽂아 두고 월요일 조회시간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그 붉은 삐라가 본의 아니게 썩 괜찮은 존재로 슬슬 둔갑한 겁니다. 
북한에 띄운 자극적인 내용의 삐라들

물론 삐라의 내용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만일 북한이 엇비슷하게라도 남쪽 상황을 삐라에 담아 유혹해왔다면 상황은 좀 달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철저한 반공교육의 결과일수도 있지만 온통 거짓과 과장으로 도배되다시피 하니 그려니 하며 줍기만 주운 겁니다.

삐라는 선전선동의 도구입니다. 조금이라도 우위의 입장이 유리합니다. 새마을운동으로 통일벼로 다수확에 성공하고 수출물량이 증대한 7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북한이 농상공 전반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소련과 동구권 붕괴로 교역과 자원조달이 끊어지고 스스로 또 고립을 자초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2013년 북한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850달러로, 포니자동차를 첫 수출하면서 ‘수출입국’ 기치를 내건 70년대 중반의 남한과 거의 같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합니다. 북한이 우리의 삐라를 놓고 안달복달 전전긍긍입니다.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시기적으로도 민감할 만합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인천이나 남북한 교류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전단지 살포 현장에서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가을걷이로 개풍이나 접경지역 일대 논밭에 북한 주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남서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강해지는 때입니다. 과거 우리가 그랬듯이 북한 주민들의 삐라 접촉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을 것입니다. 

과거 70년대 초중반 북한이 남측에 보낸 삐라들

아닌 게 아니라 상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탈북단체들이 지난 한 달에만 예년의 2배가 넘는 1000만장 이상을 풍선에 실어 보냈다고 합니다. 최근 추석명절에 날려 보낸 것만도 수 십 만장이 넘습니다.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인터넷이나 언론을 통해 본 대북전단은 저들 입장에선 충분히 뿔 날만 한 수준입니다.

우리 정부 입장은 분명합니다. 체제의 특성상 법적 근거 없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왠지 무미건조합니다. 한·미합동군사훈련 등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닌데 성의라도 표하는 그런 소박함이 아쉽습니다. 곧이곧대로 보다는 융통성있게 입장바꿔 한 번쯤 생각해 볼 때입니다. 


/hc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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