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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함영훈> 박수근은 ‘가장 따뜻한 이웃’이었다.
[헤럴드경제= 함영훈 라이프스타일 부장] 거장 박수근이 태어난지 올해로 꼭 100년이다. 1965년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서울 전농동 집에 가면 100세 생신상을 앞에 두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를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박수근이 거장이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준 내 이웃이기 때문이다.

최근 둘째 아들 성남은 살아생전 아버지가 했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예술에 대한 견해는 평범하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릴 뿐이다. 그림속 인간상은 단순하다. 이웃의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아이를 그린다”는 것이다.

박수근을 이웃에서 거장으로 바꾼 것은 바로 긍정의 힘이다. 그가 살던 강원도 양구와 서울 창신동, 전농동에서의 삶은 늘 고단했지만, 박수근이 가족 또는 이웃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괜찮아”였다.

여느때처럼 그림 판 돈으로 가장 먼저 쌀을 사온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 쌀을 강탈해갔을 때 박수근은 “괜찮아”라고 했고, 그림을 보관하던 잠기지 않은 사랑방에 도둑이 들어 작품 몇 점을 가져갔을때에도 그는 “괜찮아”라고 했다.

“괜찮아” 화법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노상’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아낙네들에게서 그들의 자식사랑을 보았고, ‘빨래터’의 여인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그녀들의 소망을 발견한다. ‘우물가’ 세 모녀의 모습에서는 재잘거림 속에 정을 나누는 그들의 ‘가난한 행복’을 목도한다. 이웃들이 일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사랑을 그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화폭에 담아갔던 것이다.

사랑 중에서 김복순씨와의 애정행각은 그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복순씨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눴던 빨래터는 무려 7작품이나 남겼다. 앵글이 비슷비슷한데도 빨래터를 자주 그린 것을 보면, 부인에 대한 사랑은 지고지순했던 것 같다.

박수근이 보여준 이웃 사랑, 그림으로 소통하려는 의지,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은 우리 사회를 보는 시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성남씨가 전한 박수근의 역사, 정치, 세계관은 이렇다. “고려는 조선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었고, 조선은 일제 암흑기를 지나 대한민국에게 물려주었고, 해방후 정치혼란은 4.19를 낳았고, 4.19는 5.16에 이 땅을 넘겼고, 그리고 5.16은 그 다음 단계 대한민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앞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주 듯, 그냥 편안히 흘러가고 있다는 관조적 자세이다.

다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는 가난한 나와 가족의 애환, 이웃의 아픔, 위정자들의 답답한 행태도 있었기에 박수근의 화폭은 정겨우면서도 번민이 묻어난다. 두터운 마티에르(Matière:질감) 효과는 얼핏 암울하다. 그러나 이 마티에르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박수근의 애잔함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질은 커졌어도 아프지 않은 시대가 없다. 그래서 미국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성적인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는 가고, 남을 감싸면서 감성적 반응을 하는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박수근은 거장이기 이전에 엠파티구스의 전형이다. 이 시대의 덕목을 이미 수십년전 실천했기에, 그는 아직 살아있다.

갈등을 줄이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박수근의 모습은 오는 17일부터 3월16일까지 서울 인사동길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고가의 작품을 선듯 내어준 소장가들의 마음도 아름답다. 거기 가면 그는 저 혼자만 가려는 사람들, 딴지 거는 사람들, 사랑이 고픈 이웃들, 모두를 반길 것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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