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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주군의 패배를 공표한 프랑스 ‘헤럴드’의 용기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영국 랭카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5세(1387~1422)가 프랑스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숱한 성(城)을 장악하게 된데는 그의 탁월한 작전 능력 외에 프랑스의 판관이자 메신저인 ‘헤럴드(herald)’의 엄정한 판단도 한 몫했다.

아쟁쿠르 일전은 헨리5세에겐 무리한 싸움이었다. 선대왕 시절 노출했던 내치에서의 혼란을 봉합하고 백성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자 백년전쟁을 다시 일으켰던 그는 무분별하게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프랑스 샤를 왕실의 ‘아르플뢰르 봉쇄작전’때 질병으로 많은 병사를 잃은 상태였다. 헨리5세는 6천명, 프랑스군은 3만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헨리5세는 베테랑 전사를 협곡에 포진하고, 궁수는 언덕위에 배치해 협곡을 지나는 프랑스 대군에 무차별 화살 및 도끼 공격을 퍼부었다. 희생은 프랑스군이 훨씬 많았지만, 프랑스군에도 싸울 여력은 남아있었다.

이때, 더 이상의 희생을 줄이고자 두 나라의 헤럴드들이 나섰다. 언덕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양측 헤럴드들은 ‘영국군 승리’에 동의하고 프랑스는 주변 몇 개의 성을 영국에게 넘겨주라고 공표한다. 승패를 판단하는 회의에 나섰던 프랑스 헤럴드는 자국의 총사령관이자 왕족인 샤를 달브레에게 패전을 안겼지만, 헤럴드의 판단은 옳았고 엄정했으며 거부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수많은 언론이 제호로 사용하고 있는 헤럴드는 원래 중세 주군의 대변인 또는 판관이었다. 중세 헤럴드의 지위는 주군과 문장관(紋章官:pursuivant:각종 의례의 주관자, 왕실 문양의 수호자) 사이 쯤에 위치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들은 정책판단과 함께 주군의 메신저 역할도 하고, 기사들의 각종 경합(tournament)때 심판관이 되기도 했다. 주군이 헤럴드의 판단을 존중하고, 그 판단을 공표토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홍보수석과 대법원장 직을 겸하는 위치였다. 매년 영국 런던 교외 윈저성에서는 헤럴드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행진이 열린다.<사진>


오늘날 헤럴드의 사전적 의미는 ‘알리다’, ‘예고하다’, ‘발표하다’, ‘전조(前兆)’, ‘주군의 사자(使者)’ 등이다. 한국의 헤럴드경제, 코리아헤럴드 뿐 만 아니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뉴질랜드 헤럴드, 보스톤 헤럴드, 헤럴드 스코틀랜드, 더 헤럴드(짐바브웨), 뉴캐슬 헤럴드, 예일 헤럴드, 엘 누보 헤럴드(중남미), 더 뉴 브리튼 헤럴드, 가톨릭 헤럴드, 레쓰브리지 헤럴드(카나다), 야키마 헤럴드, 포치 헤럴드(남아공) 등이 제호로 채택하고 있다.

프랑스 샤를 왕실이 자국 헤럴드의 ‘패전’ 결정에 승복한 점은 마치 조선시대 대사헌, 대사간의 의견을 존중해 국왕이 나라 정책을 바꾸는 모습과 흡사하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국익을 위해 달려온 대한민국의 ㈜헤럴드가 7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컨벤션에서 정홍원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창사 6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국익과 국민을 생각하는 착한 언론, ‘헤럴드’의 지적과 조언은 국정의 약(藥)이 된다는 점, 박근혜 정부가 되새겨보기 바란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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