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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세계 등반사상 최단기간 신기원 이룬 김창호 대장 山을 말하다

산 자체는 허상·도화지에 자신이 그린 그림속의 산…진정한 산행은 높이가 아닌 어떻게 올라가느냐 ‘마음먹기’에 달려

8000m 무산소 등정땐 뇌에 치명적 손상…생존본능 따라 심장서 멀리 떨어진 손·발가락부터 마비 증상 느껴

하지만, 죽음의 언저리를 넘나드는 극한상황에서 진정한 존재의 희열과 몰입의 기쁨이…

산은 나에게 꿈을 향해 전진하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정상 오르고 정상서 내려오는 무수한 반복속에 인생 담겨


경북 예천의 시골에서 태어나 굽이쳐 흐르는 백두대간을 보면서 자란 한 소년이 있었다. 어디로 떠나는 것, 모든 것을 품어안은 산을 좋아해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옆집 형 텐트에 쌀과 냄비를 챙겨 멀리 산을 오르기도 했다. 교과서보다 사회과부도를 좋아해 그걸 보면서 ‘어딘가 가고 싶다’는 동경을 하며 살았다. 성년이 되어 그의 꿈은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설산으로 향했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히말라야 14좌(히말라야 산맥의 8000m 이상 14개 고봉)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과 세계 최단기간 등정의 신기원을 이룬 김창호(44ㆍ몽벨 자문위원) 대장의 이야기다. 산이 좋아 ‘산이 곧 나 자신’이라고 말하는, 산에 미친 사나이다. 하지만 산과 함께한 그에게는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이 있었다. 그의 삶에는 죽음의 언저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서 찾은 진정한 존재의 희열과 몰입의 기쁨이 배어 있었다. 그를 만나 나눈 대화는 감동과 힐링의 합주곡이었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8000m급 등정=8000m 이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극한의 환경이다. 그곳을 산소 없이 오르는 것은 ‘죽음을 향해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인간의 의지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는 얘기다. 보통 해발 3500m가 넘으면 두통과 구토ㆍ식욕 감퇴 등 고소증세가 나타나고, 6000m 이상에서 장기간 노출되면 뇌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산소 부족과 저기압 상황에서 뇌가 붓기 때문이다. 산소를 쓰고 히말라야에 오른 산악인도 등정 후 수술을 받기도 한다.

“추위는 막을 수 있지만 산소 부족은 해결할 수가 없어요. 북극이나 남극은 기온이 영하 50~6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적인 저온 상태죠. 여기선 옷을 든든하게 입거나 콘테이너에 들어가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선 산소가 부족해 살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죽어가는 거죠. 혈액이나 세포가 변화해 한 번 갔다 오면 3년이 지나야 아이도 낳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김창호가 늦장가를 갈 때 산악인 200여명이 하객으로 대거 참석했다. 한 선배 산악인이 ‘다 모여!’하고 외쳐 모두 손가락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군데군데 잘려나가고 뭉그러진 손가락이 수두룩했다. 그 모습에 서로 너털웃음음 터뜨렸다고 한다.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과 세계 최단기간 등정 기록을 세운 김창호 대장. 그는 “어떻게 오르느냐에 따라 8000m 산을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고, 6000m를 더 높은 산으로 만들 수 있다”며 좋은 장비로 무장하고 경쟁적으로 고봉을 오르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속의 산을 오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8000m 이상에선 산소분압률이 3분의 1밖에 안돼요. 피가 모세혈관까지 제대로 돌지 못하고, 몸이 생존본능에 따라 움직이죠. 체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에요. 심장과 뇌가 중요하니까 멀리 있는 손가락 발가락부터 포기하는 거죠. 이때 산소를 먹으면 겨울에 수도배관이 녹는 것처럼 손마디가 저릿저릿하면서 혈액이 도는 느낌이 확 오지만, 그런 도움 없이 극한까지 가는 거죠.”

히말라야에는 8000m급 봉우리가 14개 있다. 이를 히말라야 14좌라 한다. 김창호는 이를 2005년부터 무산소로 올랐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8125m)를 시작으로 2007년 K2(8611m), 2008년 로체(8516m), 2010년 캉첸중가(8586m) 등을 매년 올랐다. 14번째 정점은 올 5월 에베레스트(8848m)였다. 이때 그는 인도 뱅골만의 해발 0m에서 카약(156㎞), 사이클(893㎞), 트레킹(162㎞)으로 1211㎞를 40일 동안 횡단한 후 무산소로 등정했다. 산은 사람의 몸으로만 올라야 한다는 무동력-무배출 원칙의 완결판이었다.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인 K2를 2007년에 올랐는데, 그때는 기록사진을 찍고, 앉아서 물도 마시고, 할 거 다 했어요. 에베레스트는 이보다 240m 정도 더 높은데 상황은 완전히 달랐어요. 이번에도 정상까지 올라가고, 손을 세 번 흔들고, 자기가 할 일을 다 하는데 이게 자기 인식력으로 한 게 아니었어요. 필름이 끊기듯이 기억도 끊겨요. 나중에 영상을 보며 ‘그랬구나’ 확인하는 거죠. 영상을 보니 혼자 앉아서 얼굴이 꺼멓게 돼 있는데, 완전히 죽어가는 사람이에요. 죽음의 강이 있다면 그 근처까지 간 것 아닐까요.”

낭가파르바트 등정(2005년)     로체 정상(2008년)                             마나슬루 정상(2009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2013년)

▶잡념이 사라지는 몰입의 기쁨=그렇게 험난하고 위험한데도 왜 산에 오르는 걸까.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걸까.

“산은 저에게 모든 것입니다. 고산 등반을 시작한 지 24년 동안 1년 중 5~6개월은 산에 있었고, 나머지 시간도 준비와 훈련으로 보냈으니 몸은 항상 콩밭에 있었던 거죠. 제 삶에 산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산 속에 제 삶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 대장은 진지하게 답변했지만, 그 말보다 산과 함께한 그의 삶을 보니 훨씬 더 잘 이해가 갔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충만했지만, 어려서부터 산악인을 꿈꾼 건 아니었다.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것도 거기에 들어가면 배 타고 멀리 가고, 외국 출장도 많이 갈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산악부 동아리였다.

“처음 산악부에 들어가 보니 ‘빠따’도 있고, 연습도 험해 나오려 했죠. 그때마다 선배들이 막걸리 사주면서 ‘넌 잘할 거야’하고 잡았죠. 그러다가 좀 익숙해져 암벽 선등(앞장서 올라가는 것)을 하는데, 일단 매달리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뭘 잡을까, 어디로 손을 옮길까만 생각하죠. 완전히 몰입되는 시간이었죠. 여기에 매료돼 다른 동아리를 그만두고 산악부만 했어요.”

그때부터 산과의 사랑에 푹 빠졌다. 시간만 나면 산으로 갔다. 산악부의 겨울 혹한기 훈련 때 꼬랑내가 진동하는 좁은 텐트 안에서 히말라야에서부터 가까운 일본의 북알프스나 대만의 목산 이야기를 할 땐 심장이 뛰었다.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 꿈은 1989년과 1992년 일본 북알프스 원정에 이어 1993년 파키스탄 그랑고타워(6284m)로 이어지며 현실이 됐다.

그는 지금까지 모두 30차례에 걸쳐 원정 등반에 나섰다. 2000년대 초반에는 총 1700여일 동안 혼자서 파키스탄 카라코람과 네팔 히말라야를 답사했다. 현지 경찰의 의심을 받아 잡히기도 했고, 호송 도중 도망치다 유목민에게 빵을 얻어먹기도 했다.

“혼자 고산지대를 탐사하고 베이스캠프에서 잘 땐 외롭고 고독하죠. 어둠은 사물을 가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보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죠. 내면의 갈등이 있으면 정상에 오를 수가 없어요. 히말라야 봉우리 이름은 모두 신의 이름입니다. 한국엔 산신당이 있죠. 산에도 의지가 있고, 우리가 오르는 게 아니라 산이 기회를 준 사람만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활이 안돼도 산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한참 산 이야기를 나누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김 대장은 약간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생활이 잘 안됐다”고 털어놓는다.

1998년 아웃도어 의류 유통회사를 차렸다가 1년 만에 접은 후엔 완전히 산에 빠졌다. 2001년 파키스탄에서 산 월간지 기자를 만나 탐사기 등을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가 주수입이었다.

“2000년대 초반 5년 동안은 원고료 등으로 월 30만~40만원 정도 수입이 있었죠. 그것 갖고 생활이 안되죠. 먹고 자는 건 부모님에게 의지해야 했어요. 그때 목동(서울 양천구)에 살았는데 돈이 없으니 밖에 잘 나가지도 못했죠. 광화문에 일이 있어 나왔다가 차비가 없어 목동까지 걸어간 적도 있어요. 한강다리가 그렇게 긴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런 속에서도 산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가난한 주머니에도 산에 관한 외국서적을 사 보고, 내년에는 히말라야 어디에서 어디로 간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렵게 모은 원고료와 지인의 도움을 받아 히말라야로 떠나길 반복했다.

이런 그의 열정과 간절함에 세상이 움직였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를 무산소 등정해 14좌에 ‘머리를 얹은’ 후 첫 후원자가 나타났다. 국내 아웃도어 세레또레가 그를 비상근 직원으로 채용, 1년 남짓 후원을 한 것이다. 그 후원이 끝날 때 통장에 약 1000만원이 쌓여 이걸 들고 2006년 가셔브룸 1ㆍ2봉을 올랐다. 이후 한동안 후원 없이 지내다 2008년 초 지금의 LS네트웍스를 만났다. 처음엔 국산 브랜드인 프로스펙스를 위해 일하다 일본 브랜드 몽벨을 론칭하면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후원을 받고 있다.

그가 2005년 이후 히말라야 14좌를 최단기간 무산소 등정할 수 있었던 데는 지역 산악단체가 큰 도움이 됐다. 처음에는 광주전남산악인단체와 인연이 맺어져 거기서 대부분의 비용을 조달했다. 항공료와 개인 분담금만 내고 14좌 등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광주전남의 원정이 줄어들자 이번엔 신기하게도 부산산악연맹에서 14좌 프로그램을 만들어 2011년까지 5년 동안 함께했다. 처음엔 베이스캠프까지 안내하는 파키스탄 전문가로 참여했다가 같이 올라갔다. 이것이 최단기간 14좌 무산소 등정에 결정적이었다.

▶진정한 등정은 마음의 산을 오르는 것=김 대장은 사람들이 자신을 ‘히말라야 14좌 최단기간 무산소 등정자’라고 기억하지만, 그가 더 중시하는 것은 그가 쉬운 방법으로 오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은 자연이며, 그 자연과 일체가 되려면 정당한 방법으로 산을 만나야 한다는 믿음, 큰 고통이 있어야 큰 성취감이 생긴다는 믿음 때문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그의 철학이다.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의 고봉을 향하지만, 사실 산 자체는 허상이에요. 도화지에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산이죠. 어떻게 올라가느냐에 따라 8000m 산을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고, 6000m를 더 높은 산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등산에 대한 야망이나 욕망을 갖고 8000m를 오르는 것과, 6000m를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오르는 것은 다르죠. 산 자체의 높이만으로 따지기 어려운 겁니다. 외관상의 8000m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낮은 산이라도 마음속의 1만m 봉우리를 오르는 등반가도 있습니다.”

산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으니 그가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무산소로 히말라야를 오르고, 에베레스트를 0m에서 시작한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는 히말라야가 점차 녹아내리고 쓰레기가 쌓이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표시했다.

“에베레스트 정상 아래 힐러리 스텝이 있어요. 옛날 사진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이번에 갔을 때엔 바닥이 드러나 먼지가 날릴 지경이었어요. 빙하가 녹아 말단엔 빙하호수가 생기죠. 여기선 붕괴 위험 때문에 주민이 보초를 서기도 합니다. 산소를 쓰는 경우 자기가 못 갖고 올라가요. 산소통 한 개가 3.4㎏인데 3개는 필요해요. 그러면 12㎏이 되는데 세르파가 지고 올라가야 해요. 마지막 캠프에 산소통을 버리고 가는 경우도 많아요. 지구상 가장 높은 쓰레기장이죠. 폭풍설이 휘몰아칠 때 텐트나 산소통을 챙기는 것보다 사는 게 급하기 때문이죠. 예치금 제도도 있고, 한 통 들고 내려오면 10달러도 주지만, 큰 소용이 없어요.”

그는 인터뷰 도중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 후 자다가 숨을 거둔 고 서성호 대원에 대한 안타까움을 수차례 표시했다. 김 대장과 서 대원은 서로 친형제처럼 지냈다며 그와 함께했던 지난 5년 동안의 14좌 등정 과정을 회상하는 대목에선 눈시울을 붉혔다. 김 대장은 당분간 서 대원 추모사업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사와 등반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에 미쳐 중도 포기했던 대학을 23년 만인 작년에 졸업하고, 곧이어 산악부 후배와 늦깎이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도 히말라야로 다녀왔다. 그는 히말라야를 많이 다닌 사람은 한국의 산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저절로 느낀다며 한국 산을 예찬했다.

“산에 오르는 건 항상 힘들지만, 힘이 들수록 뒤를 돌아보는 경우는 적어요. 고통스러울수록 발걸음이 힘차지죠. 정상에 오르는 건 잠깐이고, 90%를 차지하는 전후 과정이 소중한 거죠. 최종적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등정이 완성됩니다. 그걸 반복하는 거죠.”

이해준 기자/hjlee@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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