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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작가에겐 독특한 렌즈가 있는걸까? 진 마이어슨의 추상적 풍경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진 마이어슨(Jin Meyerson).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유럽과 미국, 그리고 홍콩 등지에선 이름이 꽤나 알려진 미국 작가다. 그의 파워풀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회화는 각국의 뮤지엄및 컬렉터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홍콩. 마이애미, 룩셈부르크,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가진 그가 28일부터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대표 우찬규)에서 작품전을 갖는다. ‘엔드리스 프론티어’란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2년 여에 걸쳐 작업한 대작 ‘죽음의 발명 앞에(Before the Invention of Death‘를 비롯해 최근작 등 유화 10여점이 내걸렸다. 작품들은 모두 홍콩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으로, 최근들어 더욱 강렬해진 작가의 혁신적 면모를 엿보게 한다.

진 마이어슨은 잡지, 텔레비전, 인터넷 등 속 이미지를 채집해 왜곡시키고, 이를 채색한다. 그리곤 늘리고, 줄이기를 반복하며 회화적 언어로 재해석한다. 그의 독창적인 회화는 동시대 추상회화의 또다른 맥을 잇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진 마이어슨 ‘Sleep Walker(자화상),2013, Oil on Canvas, 60x46cm(부분)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디지털과 아날로그, 추상과 구상적 요소가 뒤섞인 그의 작품은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더없이 특이하다. 대상을 이렇게 왜곡하고, 변주하는 걸 보니 그에겐 독특한 렌즈가 있지 않을까 여겨질 정도다.

마이어슨은 미디어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자연, 기계, 군중 이미지를 기반으로, 주변의 풍경을 뒤틀리듯 혼합해 묘한 형태로 변주한다. 가로 6m에 이르는 서사적 회화인 ‘죽음의 발명 앞에(Before the Invention of Death, 2009-2010)‘가 좋은 예다. 복잡한 현대도시의 정경이 마구 뭉개진 이 그림은,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원래 이미지의 선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깊이감 넘치는 푸른색, 녹색의 선과 면들이 뒤엉키며 내면적 풍경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그 쩌릿쩌릿한 기(氣)가 화폭 밖으로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진 마이어슨 ‘죽음의 발명 앞에(Before the Invention of Death) 2009-2010, Oil on Canvas(부분)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2013년 작 ‘평원(Broadacre)’은 화면을 뒤덮다시피 한 커다란 나무가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기이한 형태로 압도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는 이 나무는 홍콩 도심의 빽빽한 빌딩숲을 거의 포획할 듯 에워싸고 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불길해 보이는 예감이 ‘감각의 깊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인간군상이 바벨탑처럼 등장하는 ‘모두의 시대(The Age of Everyone, 2011-2012)‘ 또한 수수께끼같은 그림이다. 자연재해로 파괴된 건축물과 그 안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려는 사람들, 여기에 축구경기에 열광하는 듯한 군중을 어지럽게 배치했다. 따라서 감상자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몹씨 난감하다. 종국에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시각적 흥분에 빠지게 된다.

‘단 한번의 여행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A Single Journey Can Change the Course of a Life, 2013)’는 안젤리나 졸리가 모델로 등장했던 명품패션 광고의 배경이미지를 차용한 작업이다. 마이어슨은 잡지광고 중 자연배경(캄보디아 씨엠리프지역)만을 가져와 이를 뒤틀고, 재해석했다. 당초 아름다운 늪지였던 배경은 그에 의해 전혀 다른 맥락의 공간으로 재창조됐다. 작가의 남다른 붓놀림과 채색 테크닉은 낯익은 공간을 끝없는 심연 속으로 밀어넣는가 하면, 그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게도 하면서 가늠키 어려운 환타지를 전해준다.

진 마이어슨 ‘A Single Journey Can Change the Course of a Life’ 2013. Oil on Canvas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전시를 위해 내한한 작가는 “특정장소를 그렸다기 보다 내 마음 속 장소를 그렸다. 내 눈으로 보면 대상이 그렇게 보인다”며 ”내겐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작가는 소리를 내는 음원과 관측자의 움직임에 따라 음파의 진동수가 다르게 측정되는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를 예로 들며 “먼 곳에서 물체가 다가올 때, 멀리서 들렸던 소리와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가 다르지 않던가. 그런 도플러효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게 내 그림 속 이미지”라고 설명했다.

진 마이어슨은 1972년 인천에서 태어나 네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어린 시절 주위 200마일 반경에 동양인이 한명도 없었던 도시에서 성장한 그는 여섯살 때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유난히 키가 작고, 외톨이였기에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그림이 좋았던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교수였던 부친이 아들을 데리고, 미국 내 여러 도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주 찾았기에 그는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후 미니애폴리스와 펜실베니아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뉴욕, 파리, 서울을 거쳐 현재 홍콩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화가 진 마이어슨. [사진=이영란 기자]


그가 그린 자화상은 인간의 부재를 보여준다. 쓸쓸하면서도 슬픈 그림이다. 그에게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본적으로 고독하고, 슬픈 게 인간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게 인생 아니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진 마이어슨의 그림은 타이틀이 매우 심오한 게 특징이다. ‘모두의 시대’ ‘죽음의 발명 앞에‘ 같은 제목은 평소 시를 쓰길 좋아하는 작가가 직접 붙인 것이다.

작품전의 부제 또한 의미심장하다. ’사악한 자에겐 휴식이 없다‘(2013 엠마누엘 페로당 갤러리,홍콩), ’특별한 지구‘(2011 유즈 파운데이션, 자카르타), ’손목의 피로‘(2010 엠마누엘 페로당 갤러리, 파리), ’나갈 길은 없다, 하지만 항상 뚫고 나갈 길은 있다‘(2008 노흐뎅 지둥 갤러리,룩셈부르크) 등의 부제는 독특한 회화와 어우러져 또다른 여운을 선사한다. 전시는 10월 6일까지. 02)720-1524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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