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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모한 도전이 낳은 가능성의 씨앗…십센치, 인디 밴드 최초 체조경기장 공연 성료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가수가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렸다. 야광봉을 흔들던 수천여 명의 관객들이 일제히 노래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는 감격에 겨운 듯 눈가를 훔쳤다. 목이 메 노래를 잇지 못하는 가수를 향해 관객들이 환호성을 쏟아냈다. 이곳은 아이돌 그룹의 공연 현장도, 팝스타의 내한 공연 현장도 아니다. 거대한 공연장의 가운데 T자형 무대 위에 서있는 가수는 인디밴드 십센치(10㎝)였다.

십센치가 23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정규 2집 ‘2.0’ 발매 기념 단독 콘서트 ‘파인 땡큐 앤드 유?’(Fine thank you and you?)를 열었다. 국내 실내 공연장 중 최대 규모(1만 2000석)를 자랑하는 이곳은 스팅, 엘튼 존, 스티비 원더 등 세계적인 팝스타들과 조용필, 인순이, 신승훈 등 국내 대형 가수들의 독무대였다. 십센치는 이곳에서 단독 공연을 펼치는 최초의 인디 밴드여서 공연 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화제만큼 우려도 많았다. 아이돌 못지않은 높은 앨범 판매고와 연이은 공연 매진으로 ‘인디계의 아이돌’이란 수식어를 얻은 십센치이지만 체조경기장 공연은 무리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십센치가 그동안 선보여온 음악은 어쿠스틱 기반의 다소 조용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걱정은 기우였다. 8인조 밴드 형식으로 새롭게 편곡된 십센치의 히트곡들은 넓은 공연장을 소리로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주로 앉아서 공연을 펼쳐온 십센치도 T자형 무대 곳곳을 뛰어다니며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완급을 조절한 다채로운 구성은 관객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공연 초반은 어쿠스틱 무대로 꾸며졌다. ‘새벽 4시’,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등으로 이어진 어쿠스틱 무대는 기존의 십센치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출한 음악이 거대한 공연장을 공허하게 울렸다. 잠시 우려가 일었지만 다음 무대인 ‘킹스타’로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십센치는 ‘킹스타’와 박진영의 히트곡 ‘허니(Honey)’를 절묘하게 뒤섞은 무대로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슬랩 베이스와 화려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는 음악적 반전의 포인트였다. 그룹 쿨의 ‘애상’과 ‘헤이 빌리(Hey, Billy)’, ‘고추잠자리’ 메들리도 즐거웠다. ‘뷰티풀 문(Beautiful Moon)’, ‘토크(Talk)’, ‘힐링(Healing)’ 등의 곡은 록 사운드로 탈바꿈해 공연장 곳곳을 파고들었다. 기타리스트 윤철종이 부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과 멤버들의 쌈바 댄스 무대도 색다른 볼거리였다. 여기에 보컬 권정열은 공연 내내 야하고 능청스러운 멘트로 관객들을 폭소케 만들었다.

밴드 결성 당시 상황을 코믹하게 재연한 영상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긴 십센치는 2층 무대 중간에서 갑자기 마칭밴드의 모습으로 등장해 ‘사랑은 은하수 다방’을 부르며 공연 2부를 시작했다. 공연 전 발매된 미니앨범의 수록곡 ‘돈 렛 미 고(Don’t Let Me Go)’ 무대에 이어 깜짝 등장한 게스트 래퍼 버벌진트와 하하는 객석을 일시에 스탠딩으로 전환시키며 분위기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십센치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히트곡 ‘아메리카노’ 무대에선 관객들의 ‘떼창’이 이어졌다. 충성도 강한 팬들이 대규모로 모여 있을 때에만 가능한 ‘떼창’이 객석에서 펼쳐지자 십센치는 흥분한 듯 더욱 격렬한 몸짓과 무대로 화답했다. 명목상 마지막곡인 ‘이제.여기서.그만’ 무대를 끝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물러난 십센치는 연이은 앙코르 요청에 못 이긴 듯 다시 무대에 등장해 ‘죽겠네’, ‘파인 땡큐 앤드 유’를 마지막으로 공연을 마쳤다. 2시간 반 동안 역동적인 무대를 펼친 십센치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됐다”며 “이제 잠실 주경기장 공연이 남았다”고 외쳐 팬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을 찾은 관객은 약 6000여 명. 이는 인디 밴드 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이기도 하다. 소규모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을 펼치는 인디 밴드들에게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은 말 그대로 ‘꿈의 무대’다. 십센치가 무대에서 고백했듯이 이날 공연은 4년 전만해도 이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래였다. 이날 공연은 방송과 자본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꾸준한 공연과 음악의 힘으로 일궈낸 무대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를 현실로 만든 십센치는 공연 말미에 동료 인디 밴드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더 큰 무대를 약속했다. 공연 직후 무대 바깥에선 십센치의 싸인 CD를 구입하기 위한 팬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이러한 광경을 팬들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이날 십센치 공연의 성공은 인디 음악의 위상이 메이저에 못지않게 성장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동시에 인디 밴드에 문턱이 높았던 대형 공연장도 앞으로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무대에서는 인디 밴드가 결코 십센치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변화는 시작됐다.

123@heraldcorp.com

[사진제공=프라이빗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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