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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컬렉션 공개한 이명숙씨…"샌드위치로 점심 떼우며 인사동 찾았죠"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서울대 치대를 나와 연세대 치대 교수(교정학과)로, 또 강단을 떠나 여의도에서 유명 치과의원를 운영했던 이명숙 박사(69)가 젊은 시절부터 모은 그림으로 소장품전을 열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예화랑(대표 이승희,김방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의 타이틀은 ‘마음 속의 천국:어느 컬렉터의 이야기’. 지난 40년간 하나둘 모았던 그림 200여점 중 70점을 내걸었다.

이씨는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환자를 진료하다가도 점심시간이면 샌드위치 하나 사들고 인사동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일주일에 한두차례 이렇게 화랑 순례를 하고나면 가슴이 뻥 뚫렸어요. 일종의 탈출구였죠. 그렇게 사모은 그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 용기를 내봤습니다”고 밝혔다.

그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서양화가 이준(94) 화백의 장녀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 곳곳에 있던 미술서적과 아버지의 물감 냄새를 맡으며 자란 영향도 있겠지만 그림이 마냥 좋았다고 했다.
이씨는 “아버지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반듯한 한 인간이셨죠. 집과 대학(이화여대 미대)만 오가시며 그림만 그리셨어요. 손톱 밑에는 언제나 물감이 묻어 있었고, 아버지의 물감 냄새는 내 삶의 가장 향기로운 냄새였죠”라고 추억했다. 하지만 성인이 돼 그림을꾸준히 수집하게 된 것은 숨막힌 일상에서 미술이 큰 위로가 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예술가의 자제라고 해서 모두 그림 수집가가 되진 않죠. 모두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다행히 저는 제 수입이 있어서 한점 두점 사모을 수 있었죠. 명품백이며 옷 대신에, 그림에 몰두했다고 할까요? 치과에도 그림을 걸어놓곤 했는데 환자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조각가 정보원의 흥미로운 청동조각은 접수대에서 20년간 사랑을 받았죠. 개중에는 병원에 걸린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이 그림 팔면 안되겠느냐’고 매달리던 환자도 있었어요”


그는 남편(국제법 전공의 서울대 법대 백충현 교수) 또한 그림을 좋아해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번에 전시를 열게 된 것도 2007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남편을 추억하기 위해서이다. 함께 그림을 사모으고, 감상하며 행복해했던 순간을 기록한 예쁜 책자도 펴냈다.
이씨가 가장 먼저 구입한 그림은 남관(南寬) 화백의 1965년작 ‘고훈(古薰)’이다. 돌담에 낀 이끼를 형상화한 그림으로, 연세대 치대 강사로 일하던 1970년대 중반, 남관 선생의 개인전에서 구입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선생님께 ‘출품작 중 가장 좋아하시는 그림이 어떤 거냐’고 여쭸더니 ‘저거’라고 하셨죠. 1년치 봉급을 털어 샀는데 지금 봐도 좋죠”.

이후 그는 국내외 작가를 가리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수집했다. ‘마음에 와닿고, 계속 눈길이 가는 그림을 산다’는 게 원칙이다. 이씨는 “몇년 전 미술시장이 갑자기 과열됐을 때는 눈이 아니라, 귀로 그림을 사는 이들이 제법 있더군요. ‘누구누구 그림이 돈이 된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요. 그러나 그렇게 산 그림은 오래오래 보유하기 힘들어요. 애정도 잘 안가고요. 또 갑자기 뜬 작가가 쉽게 무너지는 것도 종종 봤죠. 그림은 어디까지나 눈과 마음으로 사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부친인 이준 화백의 그림도 몇 점 갖고 있다. 단 아버지에게도 작품값은 지불한다. “그림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아버지께서 ‘얘야, 물감 값은 줄 거지?’하고 물으시죠. 그래서 ‘패밀리 프라이스(가족 특가)’로 삽니다. 참, 저 아버지 그림 좋아해요. 국내 화단에서 가장 먼저 기하학적 추상을 개척한 분이신데 볼수록 그 엄정한 세계에 매료됩니다”.

이번 소장품전에는 이준 화백의 회화 ‘선회’를 비롯해, 권옥연의 ‘소녀’, 배륭의 ‘군상’, 곽훈의 ‘밤낚시’, 황주리의 ‘무제’, 이정웅의 ‘붓’ 등이 나왔다. 또 중국 작가인 펑정지에의 ‘Chinese portrait’, 데미안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해’(판화)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장샤오강 등 외국작가의 작품도 내걸렸다. 문신,유영교, 한진섭, 천선명의 조각도 볼 수 있다.
가장 아끼는 작품을 묻자 이청운의 1987년작인 ‘몽마르트르의 지붕’을 꼽았다. 파리에서 열렸던 살롱 도톤느에서 수백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대상을 수상한 작가임에도 이청운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 25년간 저 혼자 이 작품을 감상했는데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그림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공개합니다. 사람은 상대를 더러 배신하지만, 그림은 배신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를 더 좋아해주죠”.
그는 사들인 작품을 되판 적이 한번도 없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작품 판매는 하지 않는다. “나중에 제 컬렉션을 누구에게 남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누구든 작품을 잘 관리하고,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에 남기고 싶습니다.” 전시는 2월 6일까지 열린다. (02)542-5543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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