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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석하려들지 말고,충돌을 느껴봐!’ 서울대미술관의 ‘No comment’ 展
<이영란 선임기자의 아트 앤 아트>

불과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썼고, 함께 책을 나눠 읽으며 감상을 나눴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어떤가? ‘카톡’이나 SNS로 짧은 문자와 핑크빛 부호를 거의 0.5초 간격으로 쏴대고, 요모조모 손본 자신의 얼굴사진을 ‘휘리리’ 전송한다. 남보다는 오로지 내가 사무치도록 중요하며, 상호간 즉발적인 소통만이 넘쳐난다.

바야흐로 ‘하이퍼텍스트’로 통칭되는 뉴미디어 시대다. 올드 미디어가 자취를 감추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 또한 빠르게 달라졌다. 마치 언어 이전의 시대로 회귀한 듯한 현세대의 사고방식은 뉴미디어의 특성과 결합돼 변해도 너무 변했다. 이 가파르고 거침없는 의식의 변화를 살펴본 전시가 서울대학교 미술관(관장 권영걸)에서 개막됐다. 이름하며 ‘No comment’전이다.


‘노코멘트’란 본래 ‘답을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술관측은 관객들에게 답을 설정하지 않았으니, 관객들 또한 굳이 답을 찾으려들지말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충돌, 숏과 숏 사이에 감춰진 것(몽타주)을 음미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날로 파편화, 분절화되는 새 시대의 사고방식을 공유해보자는 것.

오는 2월 17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김혜란, 노재운, 문준용, 박정혁, 손정은, 오재우, 유승호, 유은주, 이정후, 정재호, 최기창, 제임스 패터슨, 줄리아 포트, 토마스 힉스, 뱅상 모리세 등 15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회화, 설치, 미디어아트, 비디오,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다양한 ‘충돌이미지’를 제시하며 관람객 스스로 이를 조합하라고 손짓한다. 


두 개의 대형 스크린이 마주보게 설치된 최기창의 영상작품 ‘Eye Contact’은 화면 속 두 인물이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만난 적조차 없다. 무작위로 채택돼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이유 없는 우연’은 알 수 없는 연결고리로 엮인 현대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불가해한 우리의 삶과 존재를 말없이 비춘다.

모두 25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유승호의 글씨작업도 흥미롭다. 온갖 생각이 무의식의 흐름처럼 꼬리를 물며 이어지거나 분열하는 유승호의 텍스트 작품은 뉴미디어 시대의 하이퍼텍스트를 꼭 닮았다.

뱅상 모리세의 컴퓨터를 위한 영화인 ‘블라 블라(BLA BLA)’는 ‘시각+청각+촉각의 총체적 충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작가는 관객들이 작품 앞에 설치된 트랙패트를 움직이며 영화를 즐기도록 했다. 트랙패트에 손을 대면 머리만 턱없이 큰 우스꽝스런 캐릭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변화한다. 물론 매끄럽지 않게 이어지는 캐릭터와의 대화는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지만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신선한 체험이다.


문준용의 작품 또한 관객참여형 작품이다. 얼핏 보면 그림자놀이를 연상케 하는 그의 작품은 커다란 아크릴판 위의 작은 육면체를 움직이면 전혀 엉뚱한 영상이 큐브 주변으로 퍼지도록 돼 있다. 알 수 없는 사운드도 퍼져나온다. 관람객은 혼돈에 빠지면서 이 낯선 이미지들과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무척 궁금증해진다.

줄리아 포트의 애니메이션 ‘The Event’는 종말론적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다. 스토리 전개, 주인공 인물의 형상화같은 전통적 기법은 간데 없고,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한편의 시(詩)를 작가는 생과 사, 질서와 혼돈을 오가며 기이하게 이어간다. 상냥하고 달콤하지만 웬지 으스스함을 선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유은주의 11분짜리 애니메이션 ‘너의 꿈 속에서 춤추는 나’ 또한 낯설고 엉뚱하긴 마찬가지다.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이를 하나의 무대 세트에 뒤섞어 재조합했다. 나의 이야기가 엉뚱한 대상과 만나,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양상을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재우 또한 기발한 작품을 내놓았다. 스틸 라이프, 곧 ‘정물-oil’이란 타이틀의 영상작품은 작가가 평소 즐겨 쓰거나 먹고 마시는 일상용품들이 북유럽의 아름다운 정물화처럼 쌓여 있다. 오렌지주스, 꿀물, 담배, 맥주, 필기구 등이 마치 탑처럼 쌓여 있는데, 그것들의 상품명을 연결해가며 오재우는 시(詩)를 썼다. 시의 내용은 인류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너지원인 석유(oil)를 두고 벌이는 강대국간 분쟁에 관한 것이다.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타이틀(이를테면 ‘꿀’)로 엉뚱한 시작(詩作)을 시도한 뒤, 이를 정물영상과 함께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오재우의 기발한 착상은 보는 이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울대미술관의 조나현 학예사는 “이번 전시는 영화 ‘전함 포템킨’을 만든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몽타주 기법’,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도한 ‘의식의 흐름 기법’, 그리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선보였던 ‘낯설게 하기 기법’ 등에 착안한 작업들을 모았다. 따라서 작가들이 보여주는 분절된 이미지는 큐비즘의 그것처럼 다차원의 모습을 한 화면에 드러내고 있다. 그 어긋난 이미지들이 주는 충돌은 적잖이 난해하고,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니 이 다양한 충돌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보라”고 권했다. 입장료 3000원(관악구민 2000원). 사진제공 서울대미술관. (02)880-9504


▶서울대미술관은?=서울대학교가 재학생 및 교직원, 서울시민의 문화 향수를 위해 설립한 현대미술관으로, 혁신적인 전시를 주로 선보인다. 세계적 건축거장 렘 쿨하스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디자인한 건물 또한 유명하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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