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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궁남지의 설경--신화탄생의 성지…순백 속의 포룡정
[헤럴드경제; 부여=남민 기자]눈 덮인 새벽, 안개 마저 짙게 드리운 궁남지는 신선이 머물던 곳 같았다. 새벽에 부여 궁남지에 도착해 꼭 보고싶었던 바로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한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만 봤다. 한참 후에야 카메라를 들고 연못을 돌면서 경이로움을 만끽했다. 정자는 물안개와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몇몇 주민들이 걷기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세바퀴를 돌았다. 돌 때 마다 사진 찍기 좋은 자리가 달랐다. 한바퀴 도는데 10분도 안걸릴 구간이지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특히 중간에 진객 청둥오리떼를 만나면서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뜻 밖의 진객이 내 사진의 귀중한 모델이 되어 줬다.

궁남지(宮南池). 약 14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사비성)에 만든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연못이다. 경주의 안압지 보다 40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 연못 주변 빙 돌아가며 심어진 오래된 버드나무가 퍽 인상적이다. 


눈 덮인 궁남지 전경. 철새도 명소를 즐기고 있다.

궁남지는 사계가 모두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겨울의 이 설경 만큼은 어느 아름다움에도 뒤지지 않는다. 지금도 부여 주민들은 ‘궁남지의 설경’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이 그랬다. 또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김선화 님도 “오늘 밤에 눈이 많이 온다니까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설경을 더 구경하시라”고 ‘강권’한다. 하지만 그걸 보면 나는 차를 갖고 서울로 못 올라간다.

그렇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마침 전날 눈이 많이 내려 지금의 설경도 나름대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겨울의 궁남지는 설경 하나로도 관광의 묘미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궁남지의 여러 모습들
궁남지의 일출
궁남지의 석양


궁남지 관광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철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음은 물론, 잘 알려진 것 처럼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이자 당대 조경예술의 극치를 담은 인공연못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여행하면 즐거움이 배가될 듯 하다.

궁남지의 가장 큰 의미는 서동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국내선 색다른 의미의 ‘신화의 장소’라는 것. 건국신화와 달리 한 왕의 탄생신화를 가진 드문 사례다. 특히 보통 고대국가에서 왕의 탄생신화는 건국초기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반해 궁남지 포룡정의 무왕 탄생신화는 백제 말기에 해당하는 한 왕에 대한 것이어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궁궐 남쪽(宮南) 연못가에 궁궐에서 나와 사는 한 여인이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서동이다. 용은 임금이나 왕족을 의미하니 서동은 결국 왕족인 셈이다. 하지만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해 그는 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후에 신라 조정 첩보 임무를 맡고 잠입한다. 서라벌에서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해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하고 결국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는 얘기다. 공원 한쪽 끝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기념탑이 조성돼 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방(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그가 바로 백제 30대 무왕이다. 마지막 의자왕의 아버지다. 무왕 35년(634년)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궁궐 남쪽에 인공연못을 축조한다. 삼국사기 무왕조에 보면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를 끌어들이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도가(道家)사상의 이상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인이자 부여군 문화관광 해설사인 윤순정 선생님은 “백제가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조경예술 기술을 소유한 국가였다”며 “일본의 조원(造園)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역사 기록에도 백제의 노자공이라는 기술자가 일본 왕궁의 정원을 꾸며 아즈카시대 정원사의 시조가 됐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상 연못의 규모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 넓었다. 무왕 37년(636년)에 빈(嬪)과 함께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고 아들 의자왕도 655년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고 한다. 오죽 넓었으면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 했을까. 그래서 지금도 부여 사람들은 이곳을 ‘마래 방죽’이라고 부른다. 마(馬)는 ‘크다’는 뜻으로 쓰여 ‘큰 못’을 의미하고 있다. 백마강(白馬江)도 ‘백제의 가장 큰 강’이라는 뜻이다. 또 이 인공연못을 옛날에는 대지(大地)라고도 불렀다.


궁남지 내 여러 풍경들

현재의 궁남지는 ‘백제 사학자 1호’로 일컬어지는 홍사준 선생이 지난 1960년대 초 현재의 이곳을 궁남지 터로 추정, 사적지로 지정됐다. 이곳에서는 근거가 될 만한 짚신과 목간 등의 유물과 당시의 수로 흔적이 발굴됐다.

이후 역사적 고증을 거쳐 지난 1965년 3분의 1 규모로 축소,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못 가운데 섬엔 무왕 탄생 신화를 상징하는 포룡정(抱龍亭)이라는 정자도 세웠다.

포룡정이 있는 연못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연못에 연꽃과 각종 야생화들이 자라고 있다. 이 궁남지는 그래서 도가와 불교사상이 결합된 곳으로도 의미가 깊다.

궁남지는 서동공원과 함께 약 10만여평의 넓은 공원이며 연못도 무려 약 1만평에 가까운 규모로 조성돼 있다. 연꽃이 만발하는 여름철이면 장관을 이룬다. 홍련, 백련, 수련, 오가하스연, 가시연, 빅토리아연 등 50여종의 연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부여군에서는 매년 7월 ‘부여 서동 연꽃축제’를 열어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을 되새기고 있다.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김선화 님은 “백제문화와 아름다운 부여관광의 명소들을 재정립하고 있다”며 “앞으로 부여에 오면 사라진 백제의 숨결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꾸미겠다”며 부여 자랑에 여념이 없다.

나는 전국을 다니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애향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가장 애국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백제의 부여시대: 백제는 도읍지에 따라 3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제 1대왕 온조왕(B.C.18~A.D.28)부터 제 21대 개로왕(455~475)까지는 한성시대이고 제 22대 문주왕(475~477)이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수도를 공주(웅진)으로 옮기면서 제 25대 무령왕(501~523)까지를 웅진시대, 그리고 임시수도로 여겼던 웅진에서 부여로 천도한 제 26대 성왕(523~554)부터 마지막 제 31대 의자왕(641~660)까지를 사비시대라 부른다.

부여읍내에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하나는 백제의 부여시대를 연 성왕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5000명의 군사로 18만 나당연합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계백장군 동상이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계백 장군(왼쪽)과 부여로 천도한 성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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