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끔찍한 시대증언, 故 김근태 ‘고문’ 다룬 ‘남영동’ 첫공개, 대선 앞두고 후폭풍 예고
〔부산=헤럴드경제 이형석 기자〕시각적인 충격은 컸다. 권력의 잔학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상은 끔찍했다. 인간 존엄성이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한 시대의 ‘증언’을 목격하는 관객의 심경은 참담했다.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을 영화화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가 제 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이슈가 되고 가운데 이 영화는 대선을 앞둔 오는 10월말 개봉예정이다. 거센 정치ㆍ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사실 관계부터 정치적 찬반까지 큰 논란을 불러왔던 정지영 감독의 전작 ‘부러진 화살’ 이상의 ‘뇌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국제영화제 갈라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된 이 영화는 5일 해운대 한 극장에서 열린 언론시사회를 통해 첫 베일을 벗었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인이 재야 민주화 운동 시절인 1980년대 정권으로부터 당한 참혹한 고문을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했다. 2000년대 이후가 짧게 등장하는 후반부 10여분간을 제외하고 ‘남영동 1985’는 약 2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고인에게 가해졌던 고문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데 집중했다. 정지영 감독은 영화를 통해 김근태의 수기 ‘남영동’에 바탕했다고 밝혔다. 

영화는 극중에서는 ‘김종태’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고 김근태 상임고문이 1985년 9월 4일 정권에 의해 납치 구금돼 당시 서울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보내야했던 지옥같은 21일간을 담았다. 어둠 속에 주인공(박원상 분)의 얼굴을 비추는 손전등만이 화면에 비추고, 이어 발길질과 몽둥이질이 가해지는 영화 초반부를 시작으로 폭행과 고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위를 높여간다. 서로를 회사원으로 부르는 형사들은 주인공을 거꾸로 세워 물이 가득찬 욕조에 거꾸로 쳐넣기도 하고, ‘칠성판’이라고 부르는 틀에 묶어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몇분간 물줄기를 쏟아붓기도 한다. 고춧가루를 물과 섞은 주전자를 코와 입에 마구 들이붓고, 최후에는 전기고문까지 동원한다. 김근태 상임고문이 설립을 주도했던 민주화청년운동연합을 공산주의 폭력혁명으로 목적으로 한 거대 간첩 조직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한 시도였다.

영화 속에서 형사들은 “배후에는 북괴가 있지 않느냐” “공산주의 폭력혁명주의자 아니냐” “국가 변란을 획책하지 않았느냐”며 주인공을 다그친다.

참혹한 폭행 속에서도 신념과 진실을 지켜가던 주인공은 고문기술자의 등장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영화 속에서 ‘이두한’(이경영 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고문경감으로 악명 높은 이근안을 모델로 했다. 형사들에 의해 ‘장의사’로 불리는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치 짐승을 다루는 조련사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주인공에게 고문을 가한다. 거대한 폭력과 공포 속에서 주인공은 시대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고문이 부른 육체적 고통과 수치심, 인간성에 대한 환멸 사이에서 울부짖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엔딩 타이틀과 함께 실제 고문피해자들의 실제 영상 증언을 담았다. 유인태, 이재오 등 재야 민주화 운동 출신의 전ㆍ현직 정치인들은 물론 건축업, 귀금속업, 중장비 기사 등 일반인들까지 카메라를 마주하며 분노와 슬픔의 표정을 보여준다. “고문을 당하면서 누군가를 증오하는 내가 악마가 돼 가고 있었다” “아직도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고문을 받을 당시에 머리에 내내 떠오른 것은 도살 직전의 돼지였다”는 증언은 영화 본편 이상으로 충격적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유신시대 평가가 뜨거운 관심이 됐던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언급도 여러차례 극중 대사로 등장한다. 극중 ‘사장’으로 불리는 치안본부 고위층(문성근 분)은 주인공을 회유하며 박정희 정권 덕분으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또 고문기술자는 “(고문대상자에게) 상처를 내면 안된다”며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은 안된다”며 말단 형사들을 호통친다.

영화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역사의 이면을 시각화하며 ‘고문과 폭력의 시대에 대한 증언’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화석같은 시간, 신화같은 시대를 현실로 끌어오면서 정말로 우리는 그 시대를 청산한 것이 맞느냐고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이 영화는 시대의 진실을 어느만큼 담아냈을까. 논란과 정치적 파장이 예고되는 이유다.

/su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