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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꽃미남 대표님’ 부터 한국사회 주무르는 ‘어둠의 대통령’ 까지
TV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회장님은…
로맨틱코미디선 여성들의 로망으로
여주인공 위한 ‘키다리아저씨’로 변신

최근 드라마선 추악한 ‘사회악’으로 묘사
사회정의 실현하고픈 대중들 욕망 투사



“사람들이 나보고 손가락질하고 한오그룹을 악덕기업이라 욕하지만, 자기 자식이 한오그룹 입사하면 사방으로 자랑하고 다니지 않드나.”

화제 드라마 ‘추적자’에서 정ㆍ관계, 법조계까지 쥐락펴락하며 대통령보다 높은 권좌에 앉았던 ‘한오그룹’ 서 회장(박근형 분)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다. 이는 대기업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속의 이중성을 겨냥하고 있어 뜨끔하다. 대한민국 1등 기업을 경원시하는 태도 이면에는 대기업의 후광을 동경하는 시선이 많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질시, 나 또한 ‘힘’을 소유하고 부려보고 싶은 욕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TV 드라마 속 재벌의 모습은 때로 추악한 ‘사회 악’으로, 때론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요즘엔 전자가 더 두드러진다. ‘추적자’에서 대한민국 굴지의 ‘한오그룹’은 여러 특정 대기업을 연상시킨다. 서 회장의 대사가 힌트다. “동생 네 놈 중에 두 놈 징역 갔고, 한 놈은 물 건너 도망가 살고, 한 놈은 제 회사 뺏겼다고 화병 나 죽었다”는 재계의 유명한 ‘형제의 난’을, “한오그룹 돈 받아묵어가 탈 난 놈 한 놈도 없데이”는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 ‘왕후장상 씨가 따로 있냐’는 질문에) 서동환 씨는 따로 있다”는 재계에 만연한 족벌식 세습 경영을, 강동윤(김상중 분)의 “장인어른이 걸어온 길이 대한민국의 역사다. 일제시대 12살 남짓한 장인어른이 지게를 짊어지고 계셨다. 지게 짊어진 소년이 이제 대한민국 경제를 짊어진 거인이 되셨다”는 어느 그룹 창업사에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를 닮았다.

비자금 조성, 배임과 횡령, 주식 편법 증여 등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과정은 무시되는 독재개발시대 방식에 능숙한 서 회장은 대한민국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어둠의 대통령 같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질시, 나 또한‘ 힘’을 소유하고 부려보고 싶은 욕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TV 드라마 속 재벌의 모습은 때로 추악한‘ 사회 악’으로, 때론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사진은 화제의 드라마‘ 추적자’의 한 장면.

사이버수사대를 배경으로 해 화제가 됐던 ‘유령’에서도 대기업은 범죄 집단을 방불케 했다. ‘세강그룹’ 2세 조현민(엄기준 분)은 가짜 백신으로 국가 정보를 통제하려 들며 정부 위에 있다. 세강 회장의 친동생 조경신(명계남 분)의 권력 쟁탈 과정에서 검ㆍ경은 너무도 쉽게 매수되고 만다.

재벌 2, 3세는 흔히 뻔뻔스러운 욕망의 집합체로 그려진다. ‘패션왕’에서 굴지의 패션기업 오너 아들 정재혁(이제훈 분) 이사는 직장 내 여자 직원을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아버지 회사’란 사고가 뿌리박혀 있는 그는 인사권도 마음대로 휘두른다.

한편 로맨틱 코미디류의 드라마에서 외모, 재력, 성격까지 갖춘 ‘재벌남’은 여성 로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재벌남이 사회적 신분이 낮은 여 주인공을 위해 백화점이나 극장,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구애하거나 ‘키다리아저씨’ 노릇을 하는 낭만적 장면(‘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가슴에’ ‘발리에서 생긴 일’ ‘꽃보다 남자’ ‘시크릿가든’ 등)은 강산이 몇 번 바뀌어도 여전히 통하는 상투다.
로맨틱 코미디류의 드라마에서 외모, 재력, 성격까지 갖춘‘ 재벌남’은 여성 로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진은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한 장면.

2000년대 이후 기업 드라마에선 과거 권력 주변부에 머물던 여성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이더스’의 유인혜(김희애 분)는 조부가 일군 대부업을 이어받아 경영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뿜는다. ‘욕망의 불꽃’에서 재벌가 며느리 윤나영(신은경 분)은 지방 토건회사에서 시작해 백화점, 조선업 진출까지 꿈꾸는 ‘대서양그룹’을 통째로 삼키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는다. 백화점 최고경영자(CEO)로서 남다른 경영 수완 능력을 발휘하는 윤나영은 실제 재계 권력 서열에서 밀리지 않는 미망인 경영자 그룹이나 유통 부문에서 활약하는 오너가 딸들과 겹친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천하그룹’의 진시황(이덕화 분)의 후계구도 맨 앞에는 남성이 아닌 외손녀 백여치(정려원 분)가 있다. 그와 대척하는 인물은 진시황 사후 그룹 경영 장악을 노리는 비서 모가비(김서형 분)로, 역시 여성이다. 이는 최근 몇 년 사이 대기업 연말연초 임원 정기인사의 화두였던 여성인력의 대거 부상 흐름과 무관치 않다.

드라마는 대부분 재벌을 실제보다 더 심하게 비틀고 과장한다. ‘추적자’처럼 사회성 짙은 드라마는 더한다. 증권가 ‘찌라시’ 같은 일화가 사실처럼 그려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약자인 개인의 영웅성이 두드러지고 대중이 열광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를 고쳐보고자 한때 드라마 작가 대상으로 선심성 사업을 펴기도 했지만, 상황을 크게 바꾸진 못했다.

세태와 대중심리를 즉각 반영하는 드라마는 흔히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기업인, 법조인,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이 유독 추하게 그려지는 것은 그만큼 그런 모습을 내심 기대하는 대중이 늘었다는 방증이다.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장기 불황, 취업난, 빈부의 격차 등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스트레스가 쌓인 대중이 책임과 비난의 대상을 대기업에 투영시켜 불만을 해소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추적자’가 2000년대 중반에 나왔다면 지금처럼 큰 이슈를 끌지 못했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모순, 부정, 부패 등이 해소가 되지 않은 채 ‘경제 정의’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한지숙 기자>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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