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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의 품격, 이젠 꽃보다‘패션’
‘미디어 속 남성패션’ 욕망에서 로망으로, 왜?
①사회 소득수준 상향…전반적 기호·소비 다양화
②세대 개인·성공주의 득세…비즈니스 영역 확장
③심리 남녀지위 평등화…‘여성 눈’으로 자신 투영


# 마흔살의 독신인 그 남자는 일주일의 하루는 아크네의 티셔츠에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카디건을 받쳐 입은 후 크롬하츠의 옷핀으로 깃을 장식한 발렌티노의 트렌치코트를 착용하고 발렉스트라의 크로스백을 맨 뒤 출근한다. 구치의 정장구두가 액셀러레이터에 얹혀진 차는 벤츠의 SUV인 ML63AMG다. 장동건이 보여주는 ‘신사의 품격’이다.

# 올해로 꼭 50세가 된 또 다른 남자. 돌체 앤 가바나의 셔츠에 ‘M.그리포니 by 존 화이트’의 데님 팬츠를 입은 차림으로 BMW 6시리즈 컨버터블 소프트탑 위에 올라타 장난스러운 포즈를 연출했다. 그 주인공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일본 남성 패션 전문지 ‘레옹’의 모델 지롤라모 판체타다. 한국판 6월호 표지가 보여주는 ‘남자의 자격’.

남자는 꽃이 되고 싶다. (왼쪽)영화 ‘차형사’와 케이블채널의 토크쇼 ‘옴므 4.0’


21세기의 남자는 꽃이 되고 싶다. 20세기 말의 남자는 미소년이었지만 21세기의 남자는 재력과 능력을 갖추고 옷을 잘 갖춰 입으며, 몸매가 좋은 꽃중년이다. 여자, 그 이상의 남성 패션이다. 국내에서 남성의 옷과 몸매가꾸기에 대한 관심이 전례없이 확산됐고, 남성 패션 시장은 ‘폭발’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을 경지에 이르렀다.

영화 ‘차형사’는 늘 떡진 머리로 밤샘근무하고 바짓단를 늘 등산양말에 우겨넣고 달릴 태세를 취하던 배불뚝이 형사가 패션계 마약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늘씬한 패션모델로 변신, 런웨이에 잠입한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영화다.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설정이지만 여성 작가가 쓴 이 시나리오는 ‘여성의 욕망’이 투사된 남성의 로망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변신하라, 남자여. 차형사로 분한 강지환은 극 중에서 2주 만에 몸무게 20㎏(실제 12㎏)를 감량한 후 식스팩의 복근에 멋진 패션감각을 소유한 남자로 거듭난다.

 이들 영화와 드라마, 잡지는 남성들의 소비와 욕구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패션과 미용 시장에서 남성의 소비는 여성에 육박하거나 이미 앞섰다. 지난 2005년 남성복 시장규모가 4조5000억원, 여성복이 6조원대였다가 지난해엔 각각 7조2700억원대, 7조1000억원대로 처음으로 역전됐다. 남성 화장품 시장도 2006년 4700억원에서 지난해엔 배 가까운 8000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올해는 1조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잡지는 타깃층의 소비 패턴과 관련 제품, 브랜드의 광고 시장의 흥망을 가장 즉각적으로 반영한다. 지난 3월엔 일본의 인기 남성지 ‘레옹’의 한국판이 창간됐고, 오는 9월엔 이탈리아의 남성 스타일 잡지 ‘젠틀맨’ 한국판도 가세해 기존의 GQ, 에스콰이어, 아레나, 맥심 등과 경쟁체제를 갖추게 됐다. 유례없는 일이다. 특히 ‘레옹’과 ‘젠틀맨’의 경우 기존 남성지의 타깃보다 연령층을 올려 30~50대를 겨냥한다. 당연히 이들 잡지가 새롭게 이상화하는 이미지는 ‘감각 있는 젊은 남자’보다 ‘성공한 남자’의 멋있고 여유있는 라이프스타일이다. 

남성 패션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반영한 드라마 ‘신사의 품격’.

 중년 남성의 몸과 옷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영화, 드라마뿐 아니라 다양한 교양,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확인된다. 올 초 KBS2 ‘남자의 자격’에선 출연진이 ‘식스팩(여섯 조각으로 나뉘어진 남성의 단련된 복근)’ 만들기에 도전해 성공한 스타들이 남성 잡지 ‘맨스 헬스’의 표지를 장식했다. 지난 4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케이블채널 XTM의 ‘옴므 4.0’은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와 배우 김민준이 진행하는 남성 패션 주제의 토크쇼다. 같은 채널의 ‘절대남자’는 전문 트레이너의 지도하에 중년 중심의 남성 참가진이 몸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 같은 남성의 옷입기, 몸매 가꾸기 잡지와 프로그램이 붐을 이룬 것은 왜일까. 일단은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기호와 소비가 다양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레옹’의 오민수 마케팅팀장은 “일본판이 창간되던 지난 2001년은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 남성관이 처음 들어선 때이기도 하다”며 “국내에선 신세계 강남점에서 남성관이 오픈(2011년 9월)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잡지가 론칭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대였고, 한국은 2007년 처음 2만달러를 돌파한 뒤 지난해엔 2만3000만달러를 기록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명목소득은 2만달러대이지만, 실질 구매력에 따른 생활수준은 3만달러다.

 한국의 세대적인 특성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지금의 40대 전후의 남성들은 획일적인 군사문화와 집단적인 대학문화를 경험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처음 몸으로 받아들인 세대이기도 하다. 또 첫 해외유학파이자 글로벌 세대로서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패션감각이 ‘성공’의 한 요소임을 깨달은 세대다.

 사회심리학적으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이 ‘여성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때 ‘된장녀’라는 비틀린 비난을 쏟아놓던 남성들이 바로 그 ‘된장녀’가 바라는 남자의 자격, 신사의 품격을 얻고자 오늘도 백화점의 명품매장을 찾고, 식스팩을 위해 피트니스센터에서 땀을 흘리며, 얼굴엔 비비크림을 바르고 고급 외제차의 카탈로그를 만지작거리는 현상은 아이로니컬하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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