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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문 연 일본 규슈 올레 4개코스 중 ‘가장 제주 스러운’ 오이타현 오쿠분고…팍팍한 삶에 지친 일본인들의 안식처로…
[오이타(일본)=박동미 기자] 길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다 같은 길은 아니다. 매일 걷는 길, 가끔 걷는 길, ‘일부러 걷는 길’도 있다. 한때 신혼여행과 효도관광의 메카였던 제주의 얼굴을 바꾼 ‘올레길’은 일부러 걷는 길이다. 올레길 덕에 제주도는 치유의 섬이 됐다. 팍팍한 삶에 지친 뭍사람들은 제주로 온다. 바다를, 산을, 사람을 벗삼아 올레길을 걷는다. 

제주 올레가 치유의 손을 일본까지 뻗쳤다. 지난 2월 말 일본 규슈 지역에도 올레길이 생겼다. 걸으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한국식 ‘슬로(Slow) 여행’이 일본에 수출된 것이다. 제주올레재단은 연간 100만엔(한화 약 1500만원)에 올레길에 관한 모든 노하우를 규슈에 전수하고 있다. 지금까지 1차로 이브스키(가고시마 현), 아마쿠사(구마모토 현), 오쿠분고(오이타 현), 다케오(사가 현) 4개 지역에 올레길이 열렸다.

지난해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급격하게 감소한 한국 관광객을 다시 불러들이고, 제주 올레가 그렇듯 도쿄ㆍ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상처받은 일본인에게도 규슈가 안식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다.

초여름의 규슈 올레를 걸었다. 개장 당시보다 조금 더 모양새를 갖췄다. 4코스 중 가장 ‘올레답다’는 오이타 현 오쿠분고다. ‘분고’는 오이타의 옛 이름으로, 한적한 기차역에서 출발해 ‘작은 도쿄’ 다케타 시에서 여정을 마친다. 일본의 전형적인 농촌ㆍ산촌 마을을 감상하고 역사를 지닌 고성(古城)을 지나는 총 11.8㎞의 코스다.

▶산골마을에서 만난 제주…올레는 ‘情’ 나누는 길=시찰을 왔던 자원봉사자와 제주올레재단 관계자는 “오쿠분고가 가장 ‘제주 올레’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바다가 없는 산골마을이다. 무엇이 닮았을까.

시골 무인역인 JR아사지역을 지나 아사지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요우코소 아사지에(아사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푯말과 함께 실물 크기의 인형가족이 올레꾼을 반긴다. 올레길이 지나는 마을 중 가장 적극적으로 길 정비에 동참했다는 아사지 주민이 직접 만들었다. 오쿠분고 코스가 제주 올레를 닮았다고 하는 건 겉모습이 아니라 이러한 살가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500여그루의 단풍나무가 있어 연간 30만명의 내국인이 다녀간다는 유자쿠 공원을 지나면 ‘피아노 절’로 유명한 후코지에 다다른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주지스님 덕에 불당에도 피아노가 있다. 방문자는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지만, 한 손 연주는 ‘절대’ 금지다. 후코지는 거대한 절벽을 마주하고 있다. 높이 20m, 폭 10m의 암벽에 새겨진 규슈 최대 마애석불(높이 11.3m)의 미소가 온화하다.

절을 돌아나오는데 저편에서 “마테(기다려요)”한다. 아사지 마을회관에서 올레꾼을 위한 간식을 마련했다고 한다. 야키소바(볶음국수)를 듬뿍 담아 건네주던 마을주민 무라카미 기미코(여ㆍ63) 씨는 “올레길 정비를 하며 주민이 오랜만에 다시 뭉쳤다”며 되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일본에서 만난 ‘올레’다. ‘정(情)’이다. 

지난 2월 말 일본 규슈에서 개장한 올레길 4코스(이브스키, 아마쿠사, 오쿠분고, 다케오)에 점점 한국과 일본의 올레꾼이 모여들고 있다. 자연을 벗삼아 걷고, 따뜻한 사람을 만난다.‘ 길여행’만 수출된 게 아니다. 보듬고 살펴 마음을 치유하는‘제주 올레 정신’까지 고스란히 전파되고 있다. 사진은 오쿠분고 코스의 산길을 걷고 있는 올레꾼 모습.

▶에도시대 난공불략 오카성…구쥬연산, 아소산까지 한눈에 = 든든히 배를 채운 후 걸으니 소가와 주상절리가 단걸음이다. 소가와 주상절리는 아소산 분화 때 화쇄류가 굳어진 암반 위로 강이 지나며 형성됐다. 예전에는 바다에서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 물건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소가와 주상절리를 지나 1㎞가량 오카성 후문까지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1185년 축조된 오카성은 1603년 이후 에도시대 난공불략의 성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1871년 메이지 시대에 문을 닫았다. 당시 오이타 출신 천재 작곡가 다키 렌타로는 폐허가 된 오카성을 보고 영감을 얻어 ‘황성의 달’이란 노래를 짓기도 했다.

오카성터에 올라서면 구쥬연산, 소보산을 비롯해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아소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성터 아래로는 구불구불한 국도가 아찔하게 펼쳐지는데, 지나는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황성의 달’ 멜로디가 울려퍼지게 설계되어 있다. 성터 꼭대기까지 들려오는 곡조를 음미하며 오쿠분고 코스의 종착지로 간다.

오카성 덕에 예부터 관광으로 번영한 다케타 시다. 오카성 입구가 올레길에선 출구다. 입장료 300엔(한화 약 4500원)을 후불로 낸다. 

오쿠분고 코스의 아사지에서는 올레꾼에게 직접 요리한 철판 야키소바를 만들어준다. 가고시마 현 이브스키 코스의 풍경.

▶‘작은 교토’ 조카마치…400년 된 식당부터 사랑을 비는 사찰까지= “아녕하세요, 우리는 ‘빅꾸방그(빅뱅)’이므니다!”

10대 남학생 한 무리가 서투른 한국어로 인사하더니, 대뜸 인기 케이팝(K-POP) 그룹 빅뱅 흉내를 낸다. 귓가엔 아직 오카산성의 구슬픈 곡조가 맴도는데, 장난끼 가득한 소년들 한 마디에 그만 웃음이 터진다. 다케타의 작은 마을 조카마치까지 흐르고 있는 한류다.

에도시대 무사가옥과 사적이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조카마치에는 400년 된 식당 ‘오카쿠야(손님집)’가 있다. 주로 상급 무사와 공주가 숙박하며 오카성의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오카쿠야에서는 에도시대 말기에 유행한 조경방식의 정원을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은 빈틈없이 정교한 반면, 이곳의 정원은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오카쿠야에서 1600엔(한화 약 2만4000원)짜리 도시락을 주문하면, 후식으로 에도시대 사람이 즐기던 화과자와 말차까지 맛볼 수 있다. 오카성 덕에 번성한 다케타답게 디저트 이름도 ‘황성의 달’이다.

오쿠분고 코스의 마지막은 꽤 낭만적이다. 오카쿠야 식당에서 배를 채운 후 옆에 위치한 사찰 간논지로 간다. 이곳에는 ‘사랑이 물드는 불당’이 있다. 본당으로 향하는 70개의 계단을 오른 후 아이젠도우(愛染堂)를 세바퀴 돈다. 사랑이 이뤄진다고 한다. 


pd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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