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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금림과 장윤현이 찍었다…‘다재다능’ 배우 김현아
가야금을 전공했다. 국악이라면 민요, 판소리, 가곡, 시조부터 장구, 단소까지 가창부터 연주까지 두루 섭렵했다. 한국무용과 발레는 ‘기본’을 익혔다. 첼로와 바이올린도 켠다. 홈쇼핑 호스트에 케이블TV의 방송 기획, 영업, 출연까지 도맡아 한 시절도 있었다.홈쇼핑에서 골프용품을 소개하기 위해 익힌 골프는 수준급이다. 최근엔 테니스 라켓이 손에 익었다. 요새는 노인요양원과 장애인 단체 등에서 이미용 봉사를 한다. 지난해 11월말부터 지금까지 217명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만졌다. SNS도 열심이다. 벌써 팔로워가 3만3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그의 본업은 배우다. 10년 동안을 무대에서, TV에서, 스크린에서 배우로서 살아왔다. 뭐를 해도 지금보다 더 돈을 잘 벌 자신이 있고, 몇 배의 수입을 올릴 때도 실제 있었지만 연기야말로 자신의 숙명이자 행복의 근원인 것을 안다. 그녀가 스스로를 소개하기 위해선 이 말 한마디면 족하다.

“나는 배우다.”

팬들도 몰라보고, 업계에서도 주목받지 못했지만, 장윤현 감독이 첫 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영화 ‘황진이’에 이어 ‘가비’에 출연했다. 만만치 않은 비중의 조연이다. 고종의 곁을 지키다 비운의 최후를 맞는 부제상궁 역할이었다. 러시아공사로 셋방살이를 간 조정의 안살림을 책임진 인물. 친일-친러 세력이 쟁투를 벌이며 왕을 궁지로 몰아넣는 어수선한 정세, 김현아는 원래부터 상궁으로 태어난 듯 연기했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다. 흔들림없이 궁녀들을 통솔하고, 왕을 수행하다가 결국 고종을 위해 죽는다.
 


“조연출이 입회한 오디션을 통해 ‘황진이’에선 행수기생 역할을 맡았어요. 장 감독님은 현장에서 처음 봤죠. 열심히 연습해서 현장 리허설을 하고 나니 감독님이 즉석에서 대사를 바꾸고 싶다며 알아서 만들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저조차도 믿기지 않게 대사를 성공적으로 바꿨더니 원래 한 신이었던 분량이 세 신으로 늘었죠.”

그래서 ‘가비’에선 장윤현 감독이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부제상궁 역으로 김현아를 염두에 뒀다. 원작소설 ‘노서아 가비’에선 없는 역할이었다. 좀 낯익다 싶은 배우들도 욕심낸 배역이었지만 장 감독은 “이미 생각해 둔 배우가 있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영화 촬영 전 “장윤현 감독이 찍었다는 김현아가 누구냐”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가비’에서 김현아의 연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TV에선 (작가) 이금림 선생님이 은인이죠. 지난해 KBS TV소설 ‘복희누나’에 좋은 배역(차필순 역)으로 발탁해주셨어요. 아직 제가 알려진 배우는 아니지만 제 연기 인생에는 장윤현 감독님과 이금림 작가님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비’에서 주연배우들의 바리스타 수업을 맡았던 김숙희씨가 운영하는 서울 서빙고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속 등장한 고풍스러운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최근 만난 김현아는 10년차의 ‘무명배우’였지만 끼와 에너지가 넘쳤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사람 특유의 낙천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4살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솔직하게 말해서 딸이니까 내 눈에나 예쁘지 객관적으로는 미인이 아니니까 배우하면 안 된다’며 말리셨죠. 음악이나 미술을 한다면 원하는데까지 뒷바라지 하시겠다고도 약속하셨구요. 그래도 결국 배우가 됐어요.”

부산대 국악과(가야금 전공)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도 음악교육을 전공한 뒤 강사와 레슨에 나섰지만 재능과 욕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2000년대 초반 우리홈쇼핑 공채 2기로 TV 카메라 앞에 1년간 섰지만 직장생활은 답답했다.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2003년 MBC 마당놀이 ‘어울우동’ 공개 오디션에 통과하며 드디어 배우의 꿈에 한발 더 다가섰다. 정규 연기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무용에 소리, 연기를 모두 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니 딱 내 일이다 싶었다. 이후 영화와 TV로 발길을 돌렸다. 기약없는 오디션 인생이었지만 ‘세번째 시선’ ‘가족의 탄생’ ‘라디오스타’ ‘아버지와 마리와 나’ ‘킬미’ ‘독’ ‘하모니’ ‘황진이’ ‘가비’까지 조ㆍ단역으로 출연한 장편영화만 20여편, 중ㆍ단편 영화가 30여편이다. TV는 사극 ‘대조영’으로 데뷔해 ‘짝패’와 단막극, ‘복희누나’ 등에 출연했다. 사극에 상궁이나 기생 역할에 인연이 곧잘 생겼고, 특기를 살려 한판 걸지게 놀거나 목청껏 소리를 뽑아올리는 연기도 주어졌다. 한 신을 연기해도 민낯으로 해야 할지, 분장을 더해야 할지 고민하니 그를 한번 기용한 작가나 감독은 만족스러울 뿐이다.

직장을 다니다가 시작한 연기가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의 목표는 단순하다. 시청자나 관객들이 “저 사람 많이 본 것 같은데, 이름은 몰라도 배우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본 관객이 적어 아쉽지만 ‘가비’의 부제상궁 역은 좋은 계기가 됐다. 여기저기서 출연해달라는 감독의 콜도 적잖이 받고, 알아보는 영화팬들도 생겼다.

“대선배인 김지영 선생님이나 김해숙 선생님같은 배우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밑바닥 인생에서 귀부인까지 어떤 역이든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저 사투리도 잘 하거든요.”

그렇게 연기를 말렸던 아버지가 ‘가비’ 개봉 후 사뭇 들뜬 목소리로 “상궁마마 영화 봤습니다”했을 때는 기분이 더 없이 좋았다. “내가 그렇게 말렸어도 우리 딸들이 결국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갈 줄 알았다면 진작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걸 후회한다”며 “이왕 시작한 길 제대로 가라”는 것도 아버지의 말씀이다. 김현아의 동생도 배우로 ‘검사 프린세스’에 출연한 김나연이다. 



영화 ‘페이스메이커’에는 “당신은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는 대사가 있다. “재능은 노력을 이길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앞설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한 여배우, ‘다재다능’ 김현아를 주목하는 이유다.

아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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