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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빈낙도’ 조선의 선비, 그들은 대부호였다
김굉필·김일손·이황·이이…

막대한 노비·전답·택지 소유

淸에 저항 목숨 던진 삼학사

그들의 지조 대상은 明황제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그 선비들의 두얼굴 해부



잘해야 본전. 인물평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수많은 반격과 비난의 화살을 감수해야 한다. 자칫 생매장 당할 수도 있다. 계승범 서강대 교수가 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 아침)는 그런 각오가 엿보인다. 그가 평가의 시험대에 올려놓은 이는 조선의 선비, 사대부다. 저자는 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선비 붐에 경종을 울린다. 선비의 그림에 매료돼 선비에 감탄하고, 선비의 시문에 취해 선비를 음미해선 안된다는 것. 인물평가는 당대의 보편적 가치에 부응했는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가 어떤 위치에서 일을 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선비의 허상을 보여주는 데 저자는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긴 유교적 덕목과 정신을 거울로 삼는다.

지조와 의리, 청빈과 안빈낙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같은 덕목들이다.

선비와 동일시되는 지조와 의리의 경우, 그것이 누구를 위한 또 무엇을 위한 지조였나란 시각에서 보면 다르다. 가령 삼전도 굴욕 이후 청 태종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경우, 그들이 목숨과 바꾼 지조의 최종 대상은 조선의 왕이 아니라 명나라의 황제였고 중화문명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선비의 덕목으로 불리는 청빈과 안빈낙도에 대해서도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흔히 사림의 상징으로 알려진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황, 이이 등 대부분의 사림 거두들은 서울과 지방에 막대한 노비와 전택을 보유한 부호들이었기에 청빈과 안빈은 절대 빈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진 자의 유유자적으로 보일 뿐이다. 개인은 부유하나 나라는 항상 가난하게 방치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황과 이이를 바라보는 눈이 고울 수 없다. 조정의 권위를 우습게 알고 유사들을 챙기라고 협박하는 자세에서 유교적 선비의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유교화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저자는 유교현상을 조선 버전의 세계화로 인식한다. 사대주의라거나 타율적, 의존적이라는 식으로 폄하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조선의 유교화는 세계 문명사에서 볼 때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란 것이다.

저자가 치밀하게 살핀 조선의 유교화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건 왜 하필 17세기부터 유교화가 집중적으로 진행됐느냐에 대한 해석이다. 왜 조선의 유교는 17세기에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 저자는 이를 명(군부)을 공격하는 청(원수)앞에 머리를 이마에 찧는 고두례를 올리며 항복한 걸 꼽는다. 이는 조선의 지배층 스스로 충효라는 유교의 양대 가치를 동시에 범함으로써 이를 덮을 정교한 플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외교상으론 어쩔 수 없이 청을 종주국으로 받아들였지만 안으론 명나라를 영원한 군부로 간주하며 더 철저하고도 애틋하게 흠모한 것이다. 17세기 급격히 나타난 예학의 치밀한 발전과 주자학의 교조화 현상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상적인 선비 덕목을 성취하기 위한 지조와 신념이라는 것도 개인의 문집에서는 액면 그대로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에서는 자기 욕심이나 고집과 명쾌하게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의리니 청빈이니 하는 가치는 언제라도 아집이나 욕심과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유교가 한국근현대사회로의 이행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아냈는지 살핀 대목도 흥미롭다. 저자는 한국문명의 쇠퇴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총을 쏘며 저항하면서 애국자로 둔갑하는 바람에 과거청산을 못 하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본다. 국권상실을 책임져야 할 이들이 졸지에 애국자로 변신하며 길고 긴 역사 청산의 고리가 겹겹이 꼬이게 됐다는 것이다.

유교주의화와 식민지 트라우마의 결합도 유교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일제 식민지사관을 벗어나는 정체성 뿌리를 찾다보니 유교주의에 가 닿은건 올바르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최근의 선비 붐은 일종의 물질주의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으나 문제는 21세기 한국의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느냐다. 의고적 취미에서 비롯된 선비에 대한 환상과 실상사이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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