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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근무규정을 위반한 골프심판

이번 타임리프는 시제가 현재다. 정확히 표현하면 불과 5일 전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다. 지난 10월 26일 충북 진천의 아트밸리 골프클럽에서 전국체전의 골프경기가 끝났다. 사실 대한골프협회(KGA)가 주관하는 전국체전은 경기운영이 가장 까다로운 대회 중 하나다. 국내부는 각 시도의 대표단에 개인전뿐 아니라 단체전이 포함되어 있어서 메달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여기에 국내부와 해외부의 경기력 차이가 아주 큰데, 시합은 같은 코스에서 동시에 진행되니 문제가 발생한다.

프로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진 국내부 선수들과 대부분 순수 아마추어인 해외부 선수들의 경기 소요시간은 큰 차이가 있다. 라운드 소요시간이 6시간이나 되는 해외부 선수들의 뒤를 따라가며 경기를 해야 하는 국내 남자부 선수들은 홀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경기리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대한골프협회의 경기위원회는 수 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원활한 경기진행을 위한 코스세팅을 준비했다. 경기위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는 해외부 각 조의 플레이가 지연되지 않도록 선수들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슬로우 플레이와 싸우는 최일선의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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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대회에서도 간혹 진행이 늦어지면 사진처럼 선수들이 아예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5번홀에서 경기위원 찾습니다’

대회 둘째 날 경기 중에 “5번홀 세컨 샷 지점에서 경기위원을 찾습니다”라는 무전이 떴다. 6번홀에 있던 A경기위원이 이동하겠다는 답신을 하고 전속력으로 카트를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 해외부 여자 3조 선수들이 파4 홀을 플레이 하고 있었는데 한 선수의 공이 바위를 맞고 뒤로 튕겨서 워터해저드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공이 해저드의 한계를 넘은 지점을 추정해 두 클럽 이내에 드롭하고 플레이하도록 상식적인 룰을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심판을 기다리며 시간을 소비했고, 뒷조는 이미 티잉 그라운드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일단 해당선수가 플레이를 하도록 유도한 후 A경기위원은 캐디와 대화했다.

“이렇게 간단한 룰로 경기위원을 부르면 경기가 계속 지연되는데 선수나 캐디가 아무도 룰을 몰랐습니까?”

“아니요, 제가 여기 드롭하면 된다고 했는데, 선수들의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심판을 불러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이번 홀이 끝날 때까지만 위원님이 동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드롭을 하고 플레이한 선수는 이후 몇 타를 더 친 끝에 그린을 조금 넘어간 프린지까지 볼을 보냈다.

신경전

이제 됐나 싶었는데 다른 선수가 그린 아래쪽에서 경기위원을 불렀다. 경기위원이 그 선수에게 달려가는데 동반 선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OB니까 원위치로 가야 한다고 말해 줬는데 심판을 부르네요.”

확인해 보니 선수는 공은 흰선으로 표시한 OB 경계를 조금 넘어갔는데, 보호로프 옆이니까 구제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경기위원은 다급해졌다.

“OB가 났으니 공을 집어 원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치십시오.”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네 원래 쳤던 지점에 가장 가까운 곳을 추정해서 드롭하고 치시면 됩니다.”

그 선수는 원위치로 뛰어가고, 캐디도 클럽을 전달하려고 뛴다. 그러는 사이에 이제 티잉 그라운드에는 두 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OB로 볼을 다시 친 선수의 공은 그린을 넘어서 워터 해저드에 들어갔던 선수의 공 옆에 멈췄다. 두 선수는 그린 앞쪽에 있는 깃발을 향해 긴 내리막 퍼팅을 했는데 한 선수의 공은 경사가 심한 빠른 그린을 지나 러프에 멈췄고, 다른 선수의 공은 역시 그린을 지나 벙커로 들어갔다. 캐디는 그 선수의 샌드웨지를 가지러 카트 쪽으로 뛰어갔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두 선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이제 페어웨이에서 한 조가 세컨드 샷을 기다리고 있었고 두 조가 티잉 그라운드에 대기하게 되었다. 두 선수는 모두 10타를 넘기며 겨우 그 홀을 떠날 수 있었다. 경기위원은 난감했다. 보통은 그 조를 따라가면서 무언의 압박을 가하여 빠른 플레이를 독촉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안 통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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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플레이는 기다리는 처지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사진처럼 앞 팀 때문에 티잉 그라운드에서 기다리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1분 회의

파4 6번 홀 티잉 그라운드까지 함께 간 경기위원은 웃는 얼굴로 선수들에게 ‘1분 회의’를 하자고 제의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조국의 골프축제에 초대받고 먼 길을 오셨습니다. 즐겁게 라운드를 하며 우정을 나눠야 하는데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이게 즐거운 표정입니까? 지금까지 라운드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샷이 잘 안 된 것뿐입니다. 저 멀리 그린에는 아직 앞 조의 선수들이 퍼팅을 하고 있습니다. 저 선수들만 따라 잡으면 되는 겁니다. 뒤에 몇 팀이 대기하든지 여러분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앞만 보면서 플레이하고,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지난 홀에서 쳤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치는 선수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앞 조를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40-50대로 보이는 4명의 선수들은 초등학생처럼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선수들의 표정은 밝아졌고, 그들의 티샷들은 똑같이 페어웨이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선수들은 이제 활짝 웃으며 경기위원에게 손까지 흔들어주고 출발했다. 선수들이 떠난 후 경기위원의 카트는 세 조가 밀려있던 5번 홀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이후 3조의 진행이 느리다는 어떤 무전도 없었다.

선의의 규정위반

그런데 A경기위원의 ‘1분 회의’는 규정 위반이었다. 그날 경기가 끝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간 A경기위원에게 대한골프협회의 운영팀 동료가 말했다.

“여자 3조가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면서 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위원님이 그 선수들의 라운드를 구해줬고, 또 오늘 하루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A경기위원은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기위원이 지켜야 할 근무규정을 위반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한골프협회의 모든 경기위원들은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 ‘경기위원은 룰과 관련된 판정 외에는 선수의 경기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언행도 삼가야 한다.’ A경기위원은 1분 회의 후에는 선수들의 성적이 훨씬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조는 메달권 밖이었으니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규정과 현실 사이에서 고심했던 경기위원은 골프심판의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골프의 본질

이 사례는 대회가 아닌 일반 골퍼들의 라운드에도 적용된다. 골퍼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면서 플레이 한다. 그러나 골퍼는 앞 조와 간격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언제든 무죄이다. 앞만 보고 가면 되는 것이지 뒤 조가 바짝 따라오든 아니면 보이지 않든 상관할 바 아니다. 뒤 조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슬로우 플레이를 하고 앞 조와 간격이 벌어지면 마샬의 경고를 받아 마땅하다.

앞 조가 너무 빠른 경우에는 우리 조에 주어진 라운드 시간을 넘기지 않는 한 잘못이 없다. 플레이 속도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골프장의 부당한 독촉에는 강력한 항의를 하기 바란다. 또 함께 라운드하는 플레이어들의 신경이 너무 예민해 지면 플레이 속도가 떨어지고 점점 더 성적이 나빠지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해야 한다. 다른 스포츠도 그렇지만 골프는 기본적으로 즐겁자고 하는 스포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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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들의 경우, 골프는 즐겁자고 하는 것이다. 앞팀과 적절한 간격만 유지하면 그만이다. 사진은 단체전 경기 장면.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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