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스포츠 타타라타] 산고곡심의 윤곡
이미지중앙

2014년에 발간된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 <위대한 올림픽>,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세계를 향한 도전>, <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 지난 3일 86세로 별세한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이 남긴 주요 책이다. 앞의 세 권은 그의 걸출한 업적이었던 88 서울 올림픽 등 스포츠외교의 활동상을 담았고, 뒤의 두 권은 언론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았다. 개인적으로 지근거리에서 그의 글쓰기를 도운 적이 있어, 이 책들을 모두 읽었고, 또 그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숱한 부고기사는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주로 큼직한 업적에 주목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그러한데 김운용처럼 생애 많은 일을 한 경우에는 그 평가가 더욱 간단치 않다. 그래서 몇 가지 소소한 이야기를 더한다.

# 윤곡(允谷). 아는 사람만 아는 고 김운용의 아호다. 고인은 1989년 여성체육발전을 위해 윤곡상을 만들었고, 이 상은 2013년부터 대한민국 여성체육대상으로 확대 개편됐다. 무슨 뜻일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의미도 잘 모르겠는데, 한자를 잘 아시는 분이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준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깊은 의미를 기대했기에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게 아주 절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윤(允)은 ‘맏’, ‘진실’ 등의 뜻이다. 첫 골짜기, 혹은 진실한 골짜기쯤 된다. 그런데 골짜기[谷]는 다시 나온다. 그가 한 매체에 게재한 칼럼의 제목이 ‘산고곡심(山高谷深)’이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다. 그는 ‘태권도의 대부’, ‘세계 스포츠계의 거물’에서 한 순간에 파렴치범에 가까운 만신창이가 됐다. 그를 잘 아는 학자가 이에 빗대 산(업적)이 높으면 골짜기(어려움)도 깊다며 책의 추천사에 ‘산고곡심’을 넣었고, 이것이 칼럼제목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쩌면 고인을 가장 잘 평가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중앙

5.16 뒤 미국합참의장 콜린스 대장과 박정희 내각수반 겸 최고회의의장 접견 때. 고 김운용(가운데)은 당시 의전비서관이었다.


# 군인, 외교관, 스포츠행정가, 정치인. 고인이 거쳤던 직업이다. 먼저 군인.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방문록에 ‘예비역 중령 김운용’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연희대학교 2학년 때 6.25전쟁에 참전했고, 4.19때 송요찬 장군의 수석부관이었다. 근대화 과정의 한국에서 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김운용의 뿌리도 군에 있었다. 외교관은 원래 꿈이었고, 5.16 쿠데타 이후인 1963년 주미대시관 참사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UN대표부, 주영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푸에블로호 사건과 청와대 습격 사건이 있던 격동의 1968년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불려들어올 때까지. 스포츠행정가(혹은 외교관)는 설명이 필요 없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 취임, 태권도의 세계화와 IOC활동 등은 지극히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정치. 고인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몰락이 바로 정치인 시절에 시작됐다는 점이다. “내 생애 가장 큰 실수가 국회의원을 한 것이었어.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묻지도 않았는데 고인이 직접 한 얘기다.

# 송요찬, 박정희, 사마란치. 한국은 물론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윤곡은 현대사의 숱한 명사들을 직접 만났다. 스스로 그중 이 세 명이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술회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다. 김운용은 청와대 비서관 시절에 앞서 군 시절부터 박정희를 알았고, 훌륭한 리더로 좋아했다. 이후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며 박정희 리더십을 몸에 익힌 듯하다. 영애 박근혜를 프랑스로 유학 보내는 것도 김운용이 한 일 중 하나였다. 흥미롭게도 윤곡은 이후 체육계에서 박정희 리더십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처럼 88 서울 올림픽 유치, 태권도 세계화 등 정말 많은 일을 해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열적인 추진력 등 장점도 닮았지만, 2인자를 키우지 않고 모든 것을 독점하다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도 흡사했다. 윤곡은 <김운용이 만난 거인들>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3배가 넘는 분량으로 박정희를 회고했다. “문세광 저격 사건 후 청와대 경호실이 바뀌었어. 사표를 낸 후 인사를 하러 가니까 ‘자네는 안 나가도 되는데...’라며 곧 다시 부르겠다며 전별금 봉투를 건넸다. 하지만 그 밑의 녀석들 때문에 나를 부르지 않았지.” 김운용은 ‘체육판 박정희’였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미지중앙

지난 8월 평창 동계올림픽 릴레이 응원메시지 캠페인에 참여한 윤곡 김운용.


# 인간 김운용. 그는 확실히 기억력이 좋았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자료를 보지 않으면서도 사람 이름, 사건, 연도 등 정확한 숫자까지 언급하며 술술 이야기했다. 여기에 어학실력은 독보적이었다. 영어하기를 좋아해 알아듣는 상대인 경우, 가끔 대화를 하다가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학교를 다닌 까닭에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잘 알았고, 한국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 조용히 지내던 시절에는 게이오대학의 초빙교수로 일본에 가 있었다. 나이 50이 넘어 러시아어를 공부할 정도로 어학에 열정이 넘쳤고, 재능도 뛰어났다. 또 타인과의 교류를 좋아했고, 아랫사람들을 잘 챙겼다. 여기에 가족 사랑도 대단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했지만 가까운 사람들과는 농담도 즐겼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몹시 부지런했고, 시간관리가 아주 철저했다. 향후 김운용에 대한 평가가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더 이뤄졌으면 한다. 참고로 김운용의 생애사와 관련해서는 연세대학교의 석사학위 논문인 ‘윤곡 김운용의 생애와 그가 한국 스포츠 외교에 미친 영향(주형철)’이 제법 알차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