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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LA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과 전북 복싱의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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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싱의 레전드, 김광선(왼쪽)과 신준섭.


복싱이 강했던 전주와 전북

지난 주 전주에서 벌어진 제27회 전북협회장기 대회에 덕진체육관의 이철승(63년생) 관장과 중앙심판위원인 곽동성(58년생) 선배 초청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행사를 빛내기 위해 문성길 챔프와 자양동에서 용인대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백달근(74년생) 관장이 필자와 함께 했습니다. 전북은 고교시절 3년 동안 제가 도 대표로 선수생활을 하던 고장이었기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글귀가 생각나더군요. 여우는 고향을 바라보고 죽는다는 뜻이죠.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고향을 잊지 못하는 본성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죠.

참고로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전주이씨 시조 묘소인 조경단이 있습니다. 이는 국사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의미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원지(發源地)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 숙종 때부터 이어진 ‘전주 대사습 놀이’는 전국의 명창들이 총집합하고, 당대의 명창들이 배출되는 등용문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전주는 멋과 풍류를 아는 예향의 도시라는 사실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전북은 한국복싱 사상 최초의 3대 메이저 대회(월드컵, 올림픽,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64년생 군산)과 역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62년생 남원)이 탄생한 복싱의 강도(强道)입니다. 특히 신준섭은 이 고장에서 복싱의 기승전결을 함께 한 복서이기에 더욱 더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협회장기는 제1회 생활체육대회를 겸한 대회로 침체된 복싱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전북아마복싱연맹의 남용우(58년생, 정읍)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습니다. 200명이 넘는 선수가 출전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는데 일반 대회와는 다르게 중등부와 고등부, 일반부에서 각 체급별 우승 및 준우승자 전원에게 파격적으로 상패와 상금이 지급됐습니다. 또 단체상과 최우수선수 및 최우수 지도자에게도 상금과 경품이 지급되는 등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대회를 통해 제2의 신준섭과 김광선이 탄생하는 대회로 거듭 태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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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철승 관장, 남용우 회장, 문성길 챔프.


시작은 평범했다

오늘의 링사이드 산책 주인공인 신준섭은 남원시 대산면 출신으로 1980년 4월 남원고 2학년때 남원체육관 김재봉(48년 광주)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시작해 6개월 만에 전국체전(LH급) 동메달을 땄습니다. 전국무대에 첫 선을 보인 후 10여 차례의 각종 대회에서 줄곧 2~3위권을 맴돌았습니다. 부산 대표인 장상기(59년생, 현 부산아마 연맹 심판장)와의 평가전에서도 패할 만큼 평범한 복서였죠. 초창기 신준섭의 복싱은 키만 껑충 컸을 뿐 이렇다 할 장점이 없었습니다. 화염방사기처럼 무섭게 품어대던 문성길 같은 강력한 공격력도 부족했고, 김동길처럼 하이테크한 기량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김광선과 같은 배짱도 없었죠. 무엇보다도 내구력이 약해 그의 경기는 살얼음판을 걷는듯 아슬아슬했죠.

하지만 신준섭의 초인적인 멘탈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신준섭은 1981년 김명복배와 전국체전 결승(미들급)에서 이호수(양명고)와 이해정(서울체고)에게 각각 덜미를 잡혔고,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는 조용래(경남대). 이남의(한국체대)의 높은 벽을 넘지못했죠. 이후 12월에 벌어진 36회 전국선수권대회에선 윤영복(경희대)에게도 거푸 패하면서 정상권과는 거리가 먼, 미운오리새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준섭은 1983년 2월 대학 2학년 때 출전한 킹스컵 선발대회에서 안영수(한체대)를 꺾고 우승하며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하지만 본선 결승에서 킬리모프(소련)에게 KO패를 당하면서 주춤했죠. 이후 전열을 정비해 오뚜기처럼 일어나 10월에 열린 로마월드컵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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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광주대통령배대회서 신준섭(좌측)과 필자.


기회가 오면 확실히 잡는다

이처럼 부침(浮沈)이 심한 것이 그의 핸디캡이었습니다. 84년 LA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도 장성호(62년 목포대)에게 다운을 당하는 등 밀렸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티켓을 획득한 신준섭은 이후 심기일전해 본선에선 기대 이상으로 선전, 4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상대는 버질 힐(64년생). 힐은 이미 8강에서 스카도(유고)에게 사실상 패한 경기를 펼치고도 홈링의 이점으로 결승까지 올라온 선수였습니다. 문제는 당시 분위기가 김동길(라이트웰터) 등 이 판정 논란 끝에 미국선수에게 패하자 김승연 회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선수단 철수라는 초강수를 띄우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점입니다. 이 경기에서 신준섭은 호랑이 굴(?)에서 홈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과 체력의 열세, 판정의 불리 등 3중고를 짊어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호각세를 이루며 미친 듯이 싸웠습니다.

호랑이굴에서는 정신만 차린다고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죽기살기로 미친듯이 달려들어야 살아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신준섭이 그랬습니다. 확실한 우세를 보인 것은 아니지만 행운의 여신은 신준섭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3ㅡ2 극적인 승리였죠. 건국 이래 최초의 올림픽 복싱 금메달이 탄생하면서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탈바꿈하는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10체급에서 결승에 진출한 미국복싱의 유일한 패배였죠. 신준섭이 금메달을 획득하자 당시 손수익 교통부장관이 철도 공무원인 신준섭 부친께 특별 승진을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손 장관은 전직 복서출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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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희 심판장, 문성길 챔프, 남용우 회장, 김재봉 관장, 곽동성 위원(좌측부터).


신준섭을 만든 두 명

이후 신준섭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현역에서 은퇴합니다. 그리고 모교인 원광대에서 강사를 거쳐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대표팀 코치를 맡았습니다. 언젠가 필자에게 “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이 담당한 이승배(용인대)와 고영삼(호남대)이 각각 금과 은을 획득했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덧붙여 동료 복싱인 중에는 곽귀근 씨(61년생, 경북체고 교사)를 해박한 이론과 풍부한 경험을 지닌 우수한 지도자로 꼽기도 했습니다.

하늘에 떠있다고 모두 별이 아닐 겁니다. 누군가에게 꿈이 되고 희망이 되고 길잡이가 될 때 세인들은 우러러 볼 것입니다. 필자가 기억하는 신준섭은 그런 자격을 충분히 갖춘 복서라고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준섭의 금메달 뒤에는 숨은 조력자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신준섭을 발탁해 육성한 김재봉(48년 광주) 관장입니다.

김 관장은 1974년 남원에 체육관을 개관하여 신준섭을 포함해 황인도와 최정진, 장종규, 박태림, 진명돌, 한정남. 황의선, 박현철, 김재철 등 수많은 국가대표급 명선수를 배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아마복싱연맹 심판장을 4년 동안 역임하면서 공명정대한 포청천으로 명성을 날렸죠. 또한 대한복싱연맹 이사와 수석 부회장, 배심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복싱인이었죠. 1989년부터 국제심판으로 활동한 김 관장은 아시안게임과 월드컵,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에서 30회에 걸쳐 활동한 베테랑 국제심판이죠. 김 관장은 제게 “1986년 남원에 신준섭 복싱기념체육관이 세워질 때 정부와 김승연 한화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표한 바 있습니다.

또 한 명은 원광대와 동양제과에서 신준섭을 지도했으며. 22년째 남원시청 감독직에 봉직하고 계시는 강월성(57년 남원 원광대) 감독이죠. 강 감독은 1976년 57회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페더급)이자, 킹스컵 결승에서 김광수(조선대)와 일전을 치렀던 전북의 간판복서였죠. 강 감독은 원광대 재임시절 86 아시안게임 2차 선발전에서 원광대 선후배로 구성된 신준섭과 황인도, 박태림, 고요다, 전진철 등을 정상에 올려놓으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1996년에 창단된 남원시청팀을 맡아 전국체전 8연패의 송학성과 역시 전국체전 6연패의 공두환을 비롯해 이광호, 유지윤, 배효조, 최준욱, 최동식 등 1세대를 키워냈습니다. 이어 전요한, 장형욱, 박관수, 신명훈 등 화수분처럼 쉼없이 좋은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서도 작년 11월 제11회 전국 실업선수권대회에서 3체급을 휩쓸며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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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문성길 챔프, 홍성식 씨, 강월성 감독.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이번 대회에서는 홍성식(67년 고창) 후배와 만남도 반가웠습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결승에서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와 인상 깊은 경기를 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담이지만 홍성식도 1984년 8월 고창고 1학년 때 뒤늦게 복싱에 입문해 1985년 8월 제6회 회장배 밴텀급 8강전에서 정양식(양명고) 선수에게 3회 RSC로 패하는 등 단 한 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하다가 졸업을 앞둔 1986년 마지막 경기인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극적으로 청주사대에 진학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인 1988년 태극마크를 달면서 부활을 알렸고 이후 상무에 입대하며 복서로써 잠재된 꽃망울을 터트리며 세계적인 클라스로 성장했습니다.

끝으로 다시 신준섭 얘기로 돌아가죠. 후배들의 전언에 다르면 신준섭은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간 후 결혼해 4남매의 가장으로 현재 애틀랜타에서 호텔 용역업을 하고 있는데, 제법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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