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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상식 백과사전 42] 골프 역사에 자취를 남긴 10인 (상)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병신년의 해가 저문다. 혼란한 올 한 해 골프는 어떠셨나? 이참에 지난 골프사 100년동안 이름을 남긴 전설같은 골퍼들의 이야기를 챙기는 건 어떨까? 내년의 필드를 상상하면서 친구 간에 나눌 만한 골프사 최근 100년간 시절을 풍미했던 10대 골퍼를 상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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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보비 존스.


보비 존스(Bobby Jones 1902.3.7~1971)
정상까지 올라갔으면 이젠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이는 뒷모습이 멋있다. 보비 존스가 그랜드 슬램(그 시절 메이저이던 US오픈, 디오픈, US아마추어, 브리티시아마추어)을 달성한 1930년은 그의 나이 고작 28살 때였다. 골프 역사상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을 이룬 뒤 최정상에서 홀연히 은퇴한다. 아마추어를 합쳐 모두 52경기에 참석해 23승을 거뒀다. 프로로 전향하면 엄청난 부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팬들의 열광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골프를 진정한 취미로 즐기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그래서 골프 선수 대신 변호사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골프를 즐기기 위해 조지아주의 호젓하고 아늑한 곳에 오거스타내셔널을 만든다. 개장 이듬해인 1934년부터 그곳에서 매년 개최하는 대회가 오늘날 최고의 메이저로 자리 잡은 마스터스가 됐다. 은퇴했지만 최고 실력의 골퍼 보비 존스가 나오고 최고의 선수들이 참가한다는 때문에 골퍼들은 그 대회를 ‘마스터스’라 불렀다. 물러날 때를 알았던 보비 존스는 골프 아마추어리즘의 승리이며, 그 때문에 그의 자취가 담긴 오거스타내셔널은 골프의 성지(聖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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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하겐.


월터 하겐(Walter Hagen 1892.12.20~1969)
“서두르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라. 그리고 길가에 핀 장미꽃 향기를 놓치지 말라.” 시(詩) 구절 같은 멋진 말을 남긴 월터 하겐은 골프 역사상 가장 쇼맨십이 강했던 골퍼다. 준수한 얼굴에 머릿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머리를 넘기고, 최첨단 골프 패션을 연출하며 매 경기마다 주목받았다. 1914년 US오픈에서 첫 우승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한 그는 골프가 미국에 파급되면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행복한 골퍼였다. 오늘날 타이거 우즈 이상의 슈퍼스타였다. 1920년대에 PGA챔피언십 4연승을 포함해 5승, 브리티시오픈 4승 등 총 11개의 메이저 우승을 챙긴 강자였다. 각종 대회와 이벤트에 참가해 1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으며 그걸 다 썼다. 그리곤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백만장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백만장차처럼 살고 싶었다.” 프로 골퍼가 충분히 백만장자가 될 수 있고,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사람이 하겐이었다. 동시에 팬에게는 멋진 플레이(특히 매치플레이)를 선보여 골프 대회에 갤러리 문화를 싹틔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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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자하리아스.


베이브 자하리아스(Babe D. Zaharias 1914.6.26~1956)
80m 허들, 투창, 높이뛰기, 농구, 테니스, 야구, 배구, 다이빙, 볼링 그리고 골프. 이 모든 운동 경기에서 당대 최고의 성적을 낸 여자가 있다면? 이름도 거창한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아스는 각기 다른 종목에서 올림픽 금, 은메달을 딴 프로 골퍼다. 원래 이름은 밀드레드였는데 어릴 적 남자 아이들과 야구를 하다 한 경기에서 홈런 다섯 방을 쳐낸 뒤에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따와 여자 베이브라고 불리게 됐다. 인형놀이를 빼곤 모든 놀이에 소질을 보인 자하리아스는 고등학교 시절 농구 선수로 활약해 대학 때까지 올스타에 뽑힌다. 대학 농구시즌이 끝나 우연히 육상을 접하게 됐는데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나 참가한 전미 육상대회의 투창, 투포환 종목에서 미국 신기록을 세웠고 높이뛰기, 투원반, 멀리뛰기에서는 대회 신기록을 세운다. 급기야 LA올림픽에서 80m허들, 투창에서 금메달을 따고 높이뛰기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다. 20대 후반에 골프를 시작한 뒤로 생업과 골프를 병행하면서 실력을 키워, 첫 해 텍사스위민인비테이셔녈에서 첫 승을 올린다. 골프에 전념하는 1946, 47년 두 해 동안 US여자오픈을 포함해 17승을 거뒀고, 1947년에는 미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브리티시오픈에서도 우승했다. 1949년 LPGA(여자프로골프협회)를 창설하는 주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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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넬슨.


바이런 넬슨(Byron Nelson 1912.2.4.~2006.9.26)
1945년은 바이런 넬슨에게 최고의 시즌이었다. 44년에 7승을 거둔 기세를 이어, 3~8월 6개월간 참가한 11개 대회마다 전부 우승했다. 긴장 한 번 안 됐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미 지난 샷은 신경 쓰지 않는다. 스코어 카드에 적힐 것은 앞으로 해야 할 샷이기 때문이다.” 시즌을 마쳤을 때 넬슨은 18승이라는 기록을 일궈냈다. 그리고 다음 해인 46년에도 5승을 했지만, 35살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하고 시골로 물러난다. 20세 때부터 15년 동안 메이저 5승을 포함해 52승을 거두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했다. 끝없는 경쟁이 몸을 소진시켰고 시합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하는 피로감이 누적됐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돈을 벌어 농장을 사는 소망’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넬슨이 골프를 시작하게 된 것도 캐디를 하면서 돈을 벌어 농장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TV해설가로 혹은 바이런넬슨챔피언십 주최자로 38년째 대회를 개최하는 등 골프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도 농장 창고에서 친구에게 선물할 나무 탁자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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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US오픈, PGA챔피언십 등 두 개의 메이저를 포함 총 10승을 올린 벤 호건.


벤 호건(Ben Hogan 1912.8.13~1997)
넬슨의 시대가 지나면서 현대 골프의 창시자 벤 호건 시대가 펼쳐진다. 벤 호건은 9세 때 아버지가 자살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캐디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웠고 왼손잡이였으면서도 클럽이 없어 오른손으로 골프를 했다. 프로 골퍼가 되고서도 7년 동안 한 차례 우승도 없었다. 하지만 서른이 지나면서부터는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2차 대전이 끝나 제대하고 골프계에 복귀해서는 1945년 5승, 이듬해 32개 대회에 참가해 무려 13승을 한다. 47, 48년에는 연속 상금랭킹 1위에 오른다. 하지만 1949년 버스와 정면 충돌하는 교통 사고를 당해 온몸이 부서지고 수술을 수없이 한다. 하지만 눈물겨운 재활 기간을 거쳐 다시 골프채를 잡았고 사고 후 16개월만에 US오픈 우승컵을 차지한다. 그뒤로도 호건은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PGA투어 63승, 메이저 9승을 한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현대 골프 스윙의 이론을 정립했다. 드라마틱한 골프 일생이 <태양을 따라(Follow the Sun)>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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