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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호택의 크로스카운터] 한국 종합격투기 1세대 파이터들의 끝나지 않은 격투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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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로드FC에서 재기전을 성공리에 마친 이은수.


링도 없는 체육관 바닥에 삼삼오오 덩치 좋은 청년들이 모여 앉았다. 바닥에는 청테이프가 붙여지고, “이 표시를 링으로 생각하라”는 조금 황당한 설명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초 종합격투기 대회 KPW 무체급 원데이토너먼트,역사적인 출발은 생각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의사도 최소한의 보호장구도 없었기에 타격은 팜파운딩(손바닥 가격)만 허용되었다. 국내 최초 무규칙격투기 연구모임 ‘암록’에서 닉네임 ‘엔센’으로 활동했던 이은수는 '암록 대표 괴수'의 명성답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상대방을 꺾어 나갔다. 또 다른 격투 동호회에서 유명세를 날리고 있던 ‘카스트라도’ 김형균을 8강에서 만난 것이 양 선수 모두에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두 선수는 예상대로 난전을 벌였다. 애초 우승후보였던 이은수는 완전히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준결승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고등학생에게 허무하게 패하며 처녀 출전 3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 재일교포 유학생 최영은 일본 아마츄어 슈토 무대에서의 격투 경험을 바탕으로 매주 저녁 9시면 한국외국어대학교 체력단련실에서 관계자 몰래 이루어지고 있던 비밀 격투 동호회 모임의 인기 스타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하고 신기했던 하체관절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동호인들에게 이 멋진 선진 문물(?)을 직접 사사해 주기도 했다. 최영은 당시 한 단계 다른 수준의 그래플링 실력을 선보이며 동체급에서 출전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한민국 종합격투기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은수와 최영의 시작은 이처럼 미약했다. 그저 격투기가 좋고,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만 가득했던 이 상남자들은 2003년 본격적인 대한민국 격투 르네상스가 열리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3년 스피릿MC 1회 대회에서 이면주와 30여 분의 혈전을 펼치며 준우승을 한 이은수는 절치부심, 결국 헤비급 챔피언 왕좌에 올랐다. 2004년 프로암 대회격인 스피릿MC 인터리그에서 우승하며 데뷔한 최영은 국내 최초 격투 리얼리티 프로그램 ‘고!슈퍼코리안’ 4인방(임재석, 이재선, 백종권, 최영)에 낙점되며 “제압해봐”라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UFC에서 상위 랭커로 활약하고 있는 김동현을 상대로 최영이 인터리그에서 판정승을 따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경기는 김동현의 유일한 국내 선수 상대 패배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 종합격투기의 메카는 장충체육관이었다. 스피릿MC를 통해 이은수가 헤비급 챔피언 벨트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고! 슈퍼코리안'의 대미를 장식한 결승전에서 임재석에게 그림 같은 카운터를 허용하며 챔피언 벨트를 넘겨줬던 최영이 20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장소도 장충체육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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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로드FC 시합 직후 촬영한 최영의 모습. [사진=최영 페이스북]


1세대 파이터의 자존심을 걸고 다시 오른 장충체육관

세월은 십여 년이 흘러 다시 장충체육관, 이제는 베테랑이 된 두 선수가 다시 한 번 링 위에 섰다. 이은수와 최영 모두 그 사이 숱한 격전을 치르며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고질적인 부상 역시 훈장처럼 얻었다. 이은수는 무릎부상과 재활로 4년의 공백기 끝에 재기전을 가졌다.

최영 역시 고! 슈퍼코리안 이후 몰락한 한국 격투시장과 한국 선수의 한계를 폄하하는 격투팬들의 편견에 실망해 “한국은 한국을 무시한다”는 말을 남긴 채 일본으로 돌아가 묵묵히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허리와 무릎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지만 일본의 격투단체 딥(DEEP)에서 미들급 챔피언에 오르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두 선수가 다시 함께 오른 무대는 현재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종합격투기(MMA)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로드FC였다.

어느새 ‘국산괴수’ 이은수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 되었고, 반항적 이미지의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던 최영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외모와 체격도 세월과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때 120kg을 넘어서던 헤비급 이은수는 이제 웰터급(77kg)을 주전장으로 활약하기 위해 근육질 몸매로 육체개조에 성공했다. -80kg이 주전장이던 최영은 오히려 미들급(84kg)으로 증량하며 체구가 커졌다.

늘 메인이벤트의 주인공이었던 이은수는 메인 게임의 첫 경기로 배정되었다. 챔피언 타이틀전만 세 경기가 열리는 최고의 매치업 임을 감안하더라도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변화였다. 최영은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최영이 고! 슈퍼코리안으로 맹활약할 당시, 막 격투기를 시작했던 차정환이었다.

시합 결과는 양 선수의 희비가 갈렸다. 이은수는 중국 선수를 상대해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이며, 일방적인 경기 끝에 1라운드 바디 파운딩 탭아웃으로 재기전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이은수의 강점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과 더불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플레이였다. 완전히 근육질 파이터로 변모한 이은수 역시 예의 창의적 공격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라운드 상황에서 몸통 공격으로 탭아웃을 받아내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복싱과 무에타이를 수련하며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몸통 공격에 집중했던 이은수는 준비했던 무기를 결과로 입증했다.

최영은 챔피언 차정환을 맞이해 예의 강력한 그레플링 카드를 들고 나왔다. 경기는 전형적인 그래플러 vs 타격가의 양상으로 이어졌다. 3라운드 종료 무승부 끝에 연장 라운드 스탠딩 상황,마지막 난타전에서 강력한 펀치 연타를 허용한 최영이 그대로 실신해 버리며 TKO패를 당했다. “대한민국 격투 1세대는 위대했다는 것을 직접 입증하겠다”던 최영은 약속대로 자신의 모든 기량을 불태운 모습을 보여줬다. 예전처럼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노장의 집념과 ‘그래플러 달인’의 자존심을 보여준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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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로드FC 035 대회의 개회선언 및 선수 소개 장면.


최영은 경기 직후 자신의 SNS에 “진 개는 할 말이 없다.열심히 연습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나지 않으면 쓰레기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세월은 흘렀지만 “결과야 결과!”를 외치던 파이터 최영의 영혼은 나이 들지 않았음을 스스로 보여줬다.

20대를 송두리째 격투기에 투신한 이들의 삶은 있는 있는 그대로가 전쟁이고 투쟁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했고, 때로는 힘겨운 현실에 고개 숙여야 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들은 글러브를 고쳐 맸다. 이들의 투쟁의지를 지탱했던 것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나 금전적 보상이었다면 어쩌면 이렇게까지 선수생활을 이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매체를 통해 이은수가 밝힌 격투기에 대한 생각으로 이들을 지탱한 ‘그 무엇’을 간접 설명하고자 한다.

“나에게 격투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이룰 수 없는 로망(?) 같은 것이다. 본능을 로망으로 승화시키는 피와 땀이 섞인 ‘과정’이 아름다운 거다.”

* 이호택은 국내 종합격투기 초창기부터 복싱과 MMA 팀 트레이너이자 매니저로 활동했다. 이후 국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격투 이벤트의 기획자로 활약했다. 스스로 복싱 킥복싱 등을 수련하기도 했다. 현재는 마케팅홍보회사 NWDC의 대표를 맡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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