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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복싱계의 징기스칸 - 홍성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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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8개 체육관의 관장들과 포즈를 취한 홍성민 '총수'(맨 왼쪽).



을사년 같은 복싱계

외교권이 박탈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을사년.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고 슬픈 분위기를 빚대어서 을사년스럽다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변형돼 지금의 을씨년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전국에 있는 복싱체육관의 관장들은 현재의 분위기를 이 을씨년스럽다는 말로 많이들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경기가 어려운 것이죠.

현재 전국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체육관만 3,000여 개가 넘고, 수도권에만 해도 1,000개 이상 포진되어 있다고 합니다. 복싱 용품을 납품하는 업자들의 일관적인 통계이니 제법 신뢰할 만합니다.

복싱인기는 뚝 떨어졌는데 체육관이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슈거 레이 레너드라는 복서에 의해 ‘복싱 에어로빅’이 탄생했고, 나오미 캠밸이라는 슈퍼모델이 이를 몸매를 가꾼다는 소문이 퍼지자 복싱 에어로빅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어 한국에서도 다이어트 물결을 타고 우후죽순격으로 전국 곳곳에 다이어트 복싱체육관이 생겨난 것이죠. 특히 몇 해 전 이시영이라는 미모의 여배우가 체육관에서 복싱으로 몸매 관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아마추어 복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다이어트 복싱은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사실 복싱이라는 운동은 한 시간에 최대 500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는, 다이어트에 아주 적합한 운동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네 슈퍼마켓처럼 복싱체육관도 한 구에만 20~30개씩 운영되고 있으니 과잉경쟁이 문제인 겁니다. 현재 경영난에 시달리는 많은 체육관이 폐업을 준비 중이이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매물이 수북히 쌓여 있다고 있다.

재미교포한테 들은 얘기인데, 미국에서 한인사회는 한국사람끼리 피말리는 경쟁을 한다고 합니다. 서로 돕는 중국사람들의 문화와 비교하면 많이 야박할 정도로 합니다. 한국 사람은 돈벌이를 찾아 빨리 전업하고, 집단의 이해를 고려하기에 앞서 개인의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돈벌이가 될성 싶으면, 기존 가게의 턱밑에 새점포를 개설하고 급기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과열 경쟁을 벌이는 사례가 흔합니다. 심지어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동족을 제쳐두고 유태인이나 중국인에게 한인타운 내의 대지나 점포를 팔아버리는 등 교포 사회에는 서로 헐뜯는 이야기들이 무성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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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차이나타운의 한 모습.



반면 중국인들은 무서운 결속력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어마어마한 상권을 장악한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면 본인의 사업을 확장하는 등 내 사업만 생각하지만, 중국인들은 돈을 모으면 서로서로 돈을 합쳐 그 일대에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건물에는 중국 사람들만 임대를 주고, 또 그렇게 돈을 벌어서 건물을 사고 다같이 단합을 해서 점점 차이나 타운의 규모를 크게 만들면서 무서운 생존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굳이 외국인을 상대하지 않아도, 또 영어를 못해도 중국인들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상권이 탄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불황을 모르는 SM복싱체육관

서론이 좀 길었네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체육관을 보유하고 있는 복싱인(김어준이 이끄는 딴지일보식 표현을 빌리면 ‘총수’)은 SM체육관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홍성민 관장입니다.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8개의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고, 곧 2개를 추가 오픈한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멀리 베트남에까지 눈을 돌려 복싱체육관을 글로벌 시대에 맞춰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죠.

그는 체육관 경영에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국민대학교에 출강하는 ‘공부하는 지도자’이고, 양천구 생활체육복싱연합회장도 맡고 있습니다. 나이요? 올해 43세입니다.

저는 1989년 봄 어느 날 영등포체육관을 찾아 등록했던 한 소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년은 요즘말로 ‘짱’이라 불리는 또래 싸움꾼이었죠.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다비드상처럼 다부진 체형, 그리고 강한 눈빛이 첫 눈에 ‘힘 좀 쓸 거’ 같은 인상을 풍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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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전국대회를 제패할 당시의 홍성민.



이듬해 제가 맡고 있던 용산공고 복싱부 팀의 일원으로 합류한 홍성민은 1991년도 서서히 끼를 발휘합니다. 그 해 서울신인대회 결승에서, 후에 MBC 신인왕에 등극하는 와룡체육관의 이종근을, 그리고 이어 벌어진 전국신인대회 결승에서 태평선식의 유윤철를 각각 2라운드에 KO시키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졸업반인 1992년에는 세계주니어선수권 선발전 준결승(밴텀급)에서 리라공고의 문철웅을 백마고지 전투처럼 치열한 난타전 벌인 끝에 26-23으로 꺾었습니다. 문철웅은 김명복배 대회에서 당시 고교랭킹 1위이던 대전체고의 임재환을 누르고 우승한 거물이었죠. 이어 홍성민은 그해 학생선수권에서 임계룡, 최준욱과 함께 창단 3년 만에 용산공고가 첫 종합우승을 달성할 때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때 생각나는 비화가 있습니다. 용산공고에서 6년 동안 단 한 푼의 급료도 지급받지 못하고 봉사활동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종합우승이라는 성과를 내자 당시 감독이 ‘최우수 지도자상’을 가져가더군요. 그때 감독이 제게 독백처럼 내뱉은 말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조 코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을 역사는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말하고 있지. 세상은 그런 거야.” 역사적 사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모습에 좀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세계챔피언을 눕힌 고등학생 홍성민

홍성민은 100m를 12초에 뛸 정도로 선천적으로 순발력이 뛰어났고, 묵직한 주먹과 함께 체력도 좋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했습니다. 1992년 토삭 옹삭파과의 5차 방어전을 앞두고 열린 문성길의 공개시범경기(원당 구민회관)에서 연출한 파란이 당시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2온즈 글러브를 끼고 4라운드로 진행된 스파링에서 고등학생 홍성민은 2라운드 때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오는 문성길의 안면에 스트레이트 연타를 적중하여, 돌주먹 세계챔피언이 로프에 의지하고 쓰러뜨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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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세계챔피언 문성길과 홍성민의 공개스파링을 목격한 당시 펀치라인 기자 박진규 씨가 홍성민 관장에 대해 쓴 기사 속 사진.



이런 홍성민은 1993년도 용인대에 입학한 후 정상적인 복싱훈련에 열중하기보다는 ‘야인시대’를 동경했습니다. 링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파링을 하는 일이 많아졌고, 거꾸로 대회에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군제대 후 딱히 할 일이 없던 홍관장은 ‘생수 배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고, 이와 함께 변정일이 운영하던 복싱체육관에서 ‘초짜 사범’으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복싱과 다시 인연을 맺었습니다.

복싱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 또 한때 외도를 한 것이 그토록 후회스러웠을까요? 홍성민은 독실한 개신교 신앙심을 바탕으로, 복싱에 사업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삶은 성실함 그 자체였습니다. 만 30세 되던 해인 2004년 현재 목동에 있는 SM체육관 본관을 차려 본격적인 체육관 사업에 나섰고, 10여 년이 훌쩍 지난 현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복싱체육관 체인업체의 총수가 된 것입니다.

홍 관장의 8개 체육관에서 등록한 연회원만 1,000명이 훌쩍 넘고, 지난 해 7월 한국복싱연( KBF, 회장 이인경) 프로테스트에는 SM에서만 무려 40명의 ‘대부대’이 참석할 정도로 현재 복싱계에서 그의 위상은 아주 높습니다.

개인적으로 홍 관장은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목동에서 근사한 아파트를 장만하는 등 재산도 상당하다는 후문입니다. 또 선교와 복싱에 후원을 많이해 복싱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복싱계의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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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복싱체육관의 6호점 개관식에서. 왼쪽부터 장정구 임채동 홍성민 필자.



현재 홍성민의 SM체육관은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체육관이 경영난에 시달리는 가운데에도 탄탄한 성장일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복싱계의 삼성전자’로 불릴 정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홍 관장을 ‘복싱계의 징기스칸’이라 불렀습니다. 징기스칸은 알렉산더 대왕보다 두 배나 많은 영토을 확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복싱체육관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홍 관장과 저의 관계는 외견상 사제지간 혹은 대학선후배지간이지만, 뜻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라는 개념이 더 강합니다. 아니, 어쩔 때는 제가 배울 게 더 많은 ‘스승 같은 후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스스럼없이 홍관장에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균형잡힌 사고방식을 지닌, 향후 한국복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 재목인 것이죠. 그는 한국복싱의 초석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프로모터로 데뷔하는 것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답니다.

홍성민 관장을 보면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시달리지 않고 냇가로 이어져 바다로 간다.’ 홍 관장의 성공은 참된 신앙이 기초한 그의 마음자세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홍 관장은 강단을 조절할 줄 아는 성품으로 강하면 부러지고 약하면 부서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또 현재 햇볕이 비추지 않더라도 태양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impossible(불가능)에 땀 한방울(아포스트로피)을 더 흘리면 i'm possible(나는 가능하다)이라는 말로 변하죠. 성실함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겸손과 베품의 미학을 아는 후덕한 인품을 가진 홍성민 SM체육관 총수가 일취월장하기를 기원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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