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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와 성(性 )] 축구 백넘버와 곤지름 바이러스 번호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과거에는 무척이나 생소했던 일인 경우가 많다. 선수들의 유니폼에 붙어 있는 ‘등번호’도 그렇다. 등번호가 없는 스포츠 경기를 생각하면 사실 무척 어색하다. 특히 국제 대회에서 심판들은 등번호 없이는 다양한 나라의 선수들을 생소한 이름만으로 구분하기 힘들 것이 자명하다. 또한 각종 스포츠 기록원들도 숫자로 적을 것을 이름으로 일일이 적는 번잡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 19세기 후반의 근대 스포츠에서는 등번호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각종 경기 운영의 필요성과, 선수들을 보다 쉽게 구분하기 위해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숫자로 선수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국제 축구 역사 연맹(IFFHS)에서는 등번호의 기원을 20세기 초 호주에서 찾고 있다. 1911년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경기에서 등번호가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등번호는 축구와 야구, 미식축구 등 유럽과 북미의 스포츠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각 종목 별로 등번호를 매기는 방식은 조금씩 다른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규칙의 변경에 있어 보다 보수적인 축구의 경우에는 등번호의 사용이 과거 조금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축구에서는 11명의 출전 선수들은 1번에서부터 11번까지의 번호만을 달 수가 있었다. 1번은 주로 골키퍼가 달았고, 포지션별로 수비수들은 보다 낮은 번호를, 공격수에 가까워질수록 높은 번호를 다는 것이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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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등번호 10번은 에이스의 몫이다.


그래서 10번이나 11번들은 주로 최전방 공격수들이 독차지를 하게 되었다. 10번이나 11번은 마라도나와 펠레가 각각 쓰던 등번호이다. 그래서인지 등번호가 자유화된 지금도 10번 혹은 11번은 팀 내 에이스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한다. 참고로 축구 등번호의 자유화는 1993년에서야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나 세균들도 각 타입별 구분을 위해 번호를 부여받는 다는 점이다. 특히 대표적인 성병의 하나인 성기 사마귀 곤지름(콘딜로마)의 원인체인 인유두종 바이러스(HPV)도 다양한 번호로 나뉘게 된다.

HPV는 거의 170여 개에 달하는 타입이 존재한다. 이 중 40개 이상의 타입이 성관계로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관계로 전파된 HPV는 성기 사마귀 곤지름은 물론, 여성에서는 자궁경부암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최근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각국에서도 HPV 퇴치를 위해 백신 접종을 장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중 우리가 주목할 만한 HPV의 “등번호”는 바로 6, 11, 16, 18번의 네 개 타입이다. 이들 네 개의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사람의 감염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16, 18번은 자궁 경부암을 일으킬 수 있는 고위험 바이러스이므로 요주의 대상이다. 축구로 치면 10번, 11번에 해당할지 모른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다행인 것은 앞서 언급했듯 이 네 개 타입의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백신이 개발되어 상용화되어 있다. 흔히 ‘자궁 경부암 백신’으로 알려져 있는 HPV 예방 백신이다. 그러나 이 백신은 여성의 자궁 경부암뿐만 아니라 남성의 곤지름과 음경암 등에도 예방 효과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선진국들에서는 학령기의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HPV 백신의 접종을 권장하고 있다.

인간 만사에서 ‘숫자’가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말이 안 통하는 해외에서도 숫자는 통한다. 스포츠에서 등번호가 도입된 이유도, 바이러스를 숫자로 분류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등번호가 스포츠 운영의 효율을 높여주듯, 바이러스 타입 번호는 질병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대응책을 향상시켜 준다. HPV의 에이스 선수들을 예방해 주는 백신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이준석(비뇨기과 전문의)

*'글쓰는 의사'로 알려진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자,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다수의 스포츠 관련 단행본을 저술했는데 이중 《킥 더 무비》는 '네이버 오늘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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