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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첫 아시아 제패’ 오연지, 그녀가 가는 길이 곧 한국여자복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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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오연지(25 인천체육회).

한달 전(8월13일) 한국 복싱계에 경사가 났다. ‘전국체전 4연패’에 빛나는 여자복싱 간판 오연지(25 인천체육회)가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 정상(60kg급)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은 2010년 광저우, 올림픽은 2012년 런던에서야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을 정도로 역사가 짧은 여자복싱에서 한국은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 은메달(박진아 60kg급), 세계선수권 동메달(심희정 64kg급) 획득으로 세계무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오연지의 아시아선수권 제패는 ‘여자복싱 강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인천AG 금메달리스트 누르고 사상 첫 아시아선수권 우승…롤 모델은 메이웨더

오연지는 이번 아시아선수권 준결승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인준화(25 중국)를 완벽히 제압해 눈길을 끌었다. 인준화는 오연지에 비해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여자복싱의 강자다. 지난해 인천에서는 오연지를 꺾고 태극마크를 달았던 박진아(26 보령시청)가 인준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쉽지 않은 상대가 분명했지만 오연지의 영리한 경기 운영이 빛났다.

“(인준화는)나이답지 않게 노련한 구석이 있었어요. 게다가 왼손잡이라 까다롭기도 했구요. 초반에는 잽 중심으로 가면서 스텝으로 흔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고 탐색전에 나섰는데, 생각보다 쉽게 들어오지 못하더라고요. ‘이거다’ 싶어 계속 견제하면서 포인트 따는데 주력했죠. 전략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오히려 오연지는 결승 상대였던 북한 리동순과의 ‘남북대결’이 더 버거웠다고 전했다. “(리동순이)나이도 또래고, 아무래도 북한 선수다 보니 친근감도 들어서 내심 말을 걸어볼까 싶었는데, 전혀 받아줄 기미가 없더라고요. 서로 눈치를 보는데 눈빛이 날카롭고 무서웠어요. 역시 왼손잡이였는데, 북한 선수들 특징이 탐색이나 견제, 이런 게 없어요. 그냥 처음부터 막 들어오죠. 그래서 초반에 되게 헤맸어요. 그러다 3,4라운드 때부터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역이용해 되받아치자고 마음먹고 들어간 게 주효해 이길 수 있었어요.”

가까이서 지켜본 지도자들은 오연지의 스타일이 꽤나 독특하다고 말한다. 구재강 한국 여자복싱 대표팀 코치는 “아웃복싱 스타일인데, 스텝이나 펀치를 내지르는 타이밍이 전형적이지는 않다. 이번 대회에서도 외국선수들이 희한하게 잘 못들어오더라. 나도 놀랐다”고 말했다. 구 코치의 말을 전해들은 오연지는 “코치님이 그렇게(독특하다고) 말씀하셨냐”고 놀라면서도 “스텝으로 상대를 흔들어놓는 건 자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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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고 있는 오연지. 사진=대한복싱협회 제공

조용하고 겁 많은 성격에 쓴소리도 많이 들어…"이제는 자신감 얻었어요"

전북 군산 태생인 오연지가 복싱에 입문한 건 중학교 때다. 어릴 때부터 육상, 축구 등 원체 운동을 좋아했고,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동경했던 오연지는 대학 시절까지 사설 복싱체육관에서 복서의 꿈을 키웠다. 그때만 해도 올림픽 정식종목도 아닌 여자복싱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었다.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남자복싱도 시들한 때에 큰딸이 그야말로 힘들고 배고파 보이는 복싱선수의 길을 걷겠다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탐탁찮은 마음은 딸이 2008년 첫 태극마크를 달고 나서야 누그러졌다. 이번 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누구보다 기뻐하신 게 부모님이다.

이제는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좌절했던 순간도 많았다. 오연지에게 가장 큰 슬럼프는 지난해 3월, 인천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했을 때 찾아왔다. 선수생활의 최종 목표가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던 터라 아쉬움은 더 컸다. 랭킹 포인트를 쌓는 여타 종목과 달리 복싱은 아무리 다른 대회를 휩쓸어도 선발전에서 한판 지면 태극마크를 달 수 없었다. 결국 인천AG 은메달리스트 박진아에게 무릎을 꿇은 오연지는 인천행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정말 뛰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안 되더라”고 말하는 오연지의 눈빛이 아직도 슬펐다.

이번 우승이 값진 이유는 또 있다. “성격도 조용한 편이고, 사실 겁도 많아요. 그래서 그런가, 운동하면서 저한테 안될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어요. 그걸 깨고 싶었거든요. 이번에 아시아선수권 우승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선수촌 생활은 어느덧 4년째다. 외출, 외박도 여의치 않고, 새벽-오전-오후-야간으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고된 훈련 스케줄에 20대 중반의 청춘은 갑갑할 법도 한데, 별로 부담이 없단다. 워낙 운동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터다. 휴식시간에는 주로 자거나, 복싱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최근 은퇴경기를 치른 메이웨더 플로이드 주니어(37 미국)가 롤 모델이라는 오연지는 ‘(메이웨더의)선수생활 말년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는 세간의 설왕설래에도 “그래도 멋있더라”고 답했다. 영락없는 소녀팬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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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지는 "넘어야할 산은 많은데, 그중에 만만한 건 하나도 없다. 열심히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리우 올림픽까지 넘어야할 산은 아직 많다

오연지의 다음 목표는 리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아시아 무대와는 또 다르다. 아일랜드, 미국, 러시아 등 우리보다 체격조건도 좋고 힘이 넘치는 선수들이 즐비하다. 본선 무대에 서기까지 넘어야할 산도 많다. 우선 올해 말에 있을 대표선발전을 통과해야 하고, 내년 1월 세계선수권에서 6위권 안에 들어야 한다. 물론 각오는 되어 있다.

“대표선발전부터 올림픽 본선까지, 저에게 만만한 상대는 단 한명도 없을 거예요. 누굴 만나더라도 지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려면 지금보다 힘은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던지기에 앞서 오연지는 오는 17일부터 강원도 원주 상지대학교에서 열리는 ‘제96회 전국체전 복싱 여자 일반부 60kg급’에 출전해 전국체전 5연패를 노린다. 올해 전국체전 복싱은 남자 선수들의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일정으로 본 대회에 한 달 가량 앞서 사전경기로 진행된다. 오연지는 “방심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반드시 5연패를 이뤄낼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다.

서두에 밝혔듯 한국 여자 복싱은 이제 막 동이 트는 시기다. 당분간 ‘사상 첫’이라는 표현이 붙을 일도 더 많을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선수가 되기보다, 특별한 선수가 되고싶다”는 오연지, 그녀가 가는 길이 곧 한국 여자 복싱의 역사가 될 듯하다. [헤럴드스포츠=나혜인 기자 @nahyein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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