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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에 미친 아스널 팬-이준석의 킥 더 무비 <피버 피치>(하)

  • 기사입력 2014-08-1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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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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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피버 피치>의 표지.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적인 이야기

『피버 피치』는 처음 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또한 2002 월드컵을 전후하여 발간된 한국어 번역본도 꽤 많은 반향을 일으켰죠. 소설에 대한 평 중에는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닉 혼비는 축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영웅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다지 대단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주인공인 혼비는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피버 피치』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교사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축구장에서만큼은 다릅니다. 『피버 피치』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경기가 열리는 순간만큼은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별다른 주목도 못 받고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혼나고도 대꾸조차 할 수 없으며, 죽어라 힘들게 일하고 그저 퇴근 후의 맥주 한 잔에 만족해야 하는 소박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 한 가운데 서는 순간,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눈앞에서는 TV에서나 보던 축구 스타들이 내 고장의 이름을 달고 뜁니다. 스포츠 뉴스에서는 아주 가끔 운 좋게도 관중석에서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의 내 모습이 비치기도 합니다. 내 목소리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합쳐져 쩌렁쩌렁한 구호와 노래로 세상을 울립니다. 그러다가 기적적인 역전골이라도 들어갈라치면! 엄청난 희열과 카타르시스, 눈물, 감동과 함께 세상은 말 그대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이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가 힘들지요.

『피버 피치』의 영화판에는 이런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축구 리그 마지막 날, 아스널의 우승을 결정짓는 리버풀과의 마지막 경기가 있습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하며 학교에서 자기 학생들도 가르치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가 파하자마자 얼른 집으로 가려 합니다. 그러자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히 주인공을 향해 “힘내라!”, “꼭 이겨라”와 같은 격려를 해 줍니다.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에겐 주인공이 곧 아스널이고, 아스널이 곧 주인공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경기가 있을 때마다 축구팬들은 자기 팀과 자신이 하나로 취급 받으며 희열을 느낍니다. 물론 저도 수원 경기가 있을 때, 직장과 가정에서 비슷한 취급을 받지요.

이처럼 <피버 피치>에는 분명히 우리 일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지만 축구팬 혹은 서포터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세상의 영웅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삶에 힘겨워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관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축구장의 열혈 서포터들은 마치 현실의 울분을 축구장에서 쏟아내는 패배자들의 모습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축구팬과 서포터들의 관점은 정반대입니다. 축구팬들에게 있어 진짜 세상은 바로 축구장 안의 세상입니다. 오히려 경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만나게 되는 지루한 일상의 대부분은 축구팬들에게는 그저 부질없는 삶의 군더더기일 뿐이지요. 축구팬들의 자아실현의 기회는 직장에 있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번 돈으로 축구장에 들어가 내 팀의 우승 장면을 보는 게 바로 진정한 ‘자아실현’이지요. 축구팬의 노래는 세상의 유행가가 아닙니다. 경기장에서 엉망진창인 음정과 박자로 고래고래 다 같이 부르는 서포팅 곡(축구 응원가)이 바로 축구팬의 노래이지요. 축구팬의 정장은 유니폼이며, 축구팬의 생일은 내 팀의 창립일입니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축구팬은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잉글랜드의 축구팬은 주말의 2시간을 위해 1주일을 산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K리그 서포터들을 포함한 전 세계 대부분의 축구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피버 피치>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웅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축구팬 대부분은 이미 예전부터 축구장에서 영웅들이었기 때문이지요. 다만 세상 사람들이 축구팬들의 세계에 못 들어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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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 팬들의 모습.

축구냐 사랑이냐?

이것은 대부분의 축구팬들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여성 축구팬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축구는 남성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축구장 관중석의 분위기는 더 그렇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제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축구장에는 야구장보다 여성 관객들이 적은 것 같다.”

사실 K리그에도 많은 여성 서포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장의 응원 문화는 다른 종목에 비해 남성적입니다. 야구장이나 농구장에서처럼 앰프를 통해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추어 막대 풍선을 두드리고, 응원단장과 치어리더가 앞에 나와 응원에 미숙한 관중들을 유도하는 모습은 축구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니 오히려 골수 축구팬과 서포터들이 대단히 싫어하는 광경이죠. 축구장에서는 친절하게 응원을 가르쳐주는 응원단장도, 어색한 관중들을 독려하는 치어리더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요즘 서포터와 일반 관중 간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서 치어리더를 도입하는 구단들도 있지만 야구나 농구와 달리 서포터들의 응원을 일반 관중들에게 전달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칠 뿐입니다.

단순한 북소리에 맞추어 박수 구호를 외치고, 반주 없는 고약한 아카펠라 같은 서포팅 곡이 울려 퍼집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 간의 몸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사방에서 서포터들의 신경질적인 욕설이 터지고 가운데손가락이 올라갑니다. 처음엔 무질서해 보이지만 이 모습은 경기와 조화를 이루며,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축구장 특유의 화음을 만들어내죠. 물론 축구장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축구와 관련 없는 평범한 삶을 살던 여성들에게 이런 장면은 당황스럽게 다가오곤 하죠.

이런 축구장의 남성적인 문화 때문에 많은 축구팬과 서포터들은 연애 전선에서 고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그 놈의 축구 경기는 왜 하필 놀기 좋은 주말에만 있는지. 결국 많은 축구팬들이 ‘축구냐 사랑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곤 하죠.

원작 소설에선 이런 딜레마가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피버 피치>에서는 이 불안한 러브스토리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룹니다. 영화에서는 소설에 없는 같은 학교의 여교사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축구팬인 남자 주인공에게 호감을 갖게 되죠. 이 남자랑 잘해 보려고 하지만 남자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스널’밖에 없습니다.

결국 여성은 남자와 함께 아스널 경기를 보러 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큰 맘 먹고 간 경기장에서 여자는 엄청난 봉변을 겪게 됩니다. 의자도 없는 시멘트 스탠드의 관중석에서 여자는 수많은 성난 남자 축구팬들 사이에 이리저리 채이며 부대낍니다. 같이 간 남자는 축구를 보느라 여자에겐 관심도 없죠.

하필 남자와 여자가 같이 축구를 보러 간 그 날은 잉글랜드 축구의 대참사였던 ‘힐스보로 참사(Hillsborough disaster)’가 일어났던 날이었습니다. 1989년 4월 15일, 노팅엄과 리버풀의 경기 당시, 관중석의 팬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96명이 압사당한 참사였죠. 다행히 다른 경기장의 일이었지만 여자는 이 날의 기억으로 축구라면 치를 떨게 되고 결국 남자와 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는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죠. 그의 머릿속에는 아스널이 리버풀을 제치고 기적적으로 우승을 차지할 확률 계산만 가득 차 있죠.

여자는 축구에 빠진 이 남자를 잊어 보고자 하지만 매일 밤 스포츠 뉴스 시간마다 아스널의 성적을 챙겨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자의 친구는 이렇게 말하죠. “이건 남자들의 음모야. 남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여자 친구에게 각인시켜서 헤어진 이후에도 스포츠 뉴스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하려고 하지.” 아무튼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못 잊는다는 것을 알고 다시 남자를 찾아갑니다. 하필이면 그 날이 아스널과 리버풀의 최종전이 열리는 축구 리그 마지막 날이었죠.

하지만 애써 찾아간 남자의 집 앞, 축구 중계에 열중한 남자는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여자를 내쫓아 버립니다. 상심한 여자는 쓸쓸히 집에 가 버리고, 그 와중에 아스널은 기적적으로 역전골을 넣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기쁨에 겨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아스널 팬들 사이에서 여자와 남자는 극적인 재회를 하죠. 기쁨에 겨운 축구팬들 한 가운데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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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널은 2006년부터 신축된 에미레이트 경기장(Emirates stadium)을 홈으로 쓰고 있다.

영화 <피버 피치>는 이처럼 축구와 사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축구팬이 결국 양 쪽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극적으로 윈-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은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요? 책에도 이런 내용은 안 나오고요. 아마 영화의 결말은 전 세계 축구팬들의 소망을 표현한 것일 뿐, 현실성은 다소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 물론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많아지면 당연히 좋은 거지요.

결국 축구의 중심은 팬이다

우리 K리그에서는 아직까지 팬들이 제대로 된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원해 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고 이전도 몇 번 일어났고요. 게다가 서포터들의 생각이 구단 운영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프로 스포츠에서 자기 팀을 좋아하는 팬들의 영향력이 미미한 우리네 현실에서 이 작품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 내 팀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축구팬들. 그 모습은 비단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우리 한국에서 축구팬들의 자기 팀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프로구단을 운영하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한 번씩 꼭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축구팀이 팬과 서포터들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면 우리 프로 스포츠 문화도 발전하지 않을까요? 피버 피치 편 <끝>

덧붙여: 영화 <피버 피치>에서 참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 남자 주인공의 꼬마시절 학교를 갈 때 감미로운 영국의 록발라드가 흐릅니다. ‘The La’s’의 ‘There she goes’입니다. 몇 년 전에 ‘식스펜스 넌 더 리처(Sixpence None the Richer)’라는 밴드의 여자 보컬이 리메이크해서 더 유명해진 노래입니다. 영화에서는 약간은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남자 목소리의 원곡이 흐르는데, 왠지 축구의 고향이면서 비틀즈의 고향이기도 한 영국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묘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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