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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광장-김준형 의사 칼럼니스트] 레이와의 지폐
지금 이웃 나라 일본은 축제 분위기다.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하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가고 레이와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일본 지폐의 모델이 되는 인물을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무언가 좀 꺼림직 하다.

일본은 지폐 모델을 대략 20년 주기로 바꾸어 왔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지폐의 모델은 2004년에 지정된 인물들이다. 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천엔 지폐의 모델은 ‘노구치 히데요’다. 그는 두 살 때 왼손에 심한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기 힘든 지경이었지만 초등학교 때 주변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아 기능의 70퍼센트 정도를 회복했다고 한다. 노구치 히데오는 이 때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의사가 된 뒤에도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 매독균을 발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여러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특이한 사실은 그가 아이즈 지방 출신이라는 점이다. 천황을 지지하는 신정부군과 막부를 지지하는 막부군이 붙어 싸운 ‘무진전쟁’ 때 아이즈 지방은 막부의 편에 섰다. 막부 편에 섰던 다른 지방들이 하나씩 항복했지만 아이즈 지방 사람들은 여자들과 아이들도 총을 들고 나와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잡은 일본의 유신정부는 아이즈 출신 인물을 관리로 쓰지 않았다. 관직을 얻을 수 없던 아이즈 사람들은 학문이나 예술분야로 뛰어 들었다고 한다.

오천엔 지폐의 주인공은 ‘히구치 이치요우’이다. 메이지 시대의 여류작가로 일본 화폐 최초의 여성 모델이기도 하다. 당시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여성의 삶과 고뇌를 이야기 했고 특히 서민의 삶을 잘 묘사한 작가라고 한다. 만엔의 모델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가 ‘탈아론(脫亞論)’으로 아시아 침략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고 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권장’을 쓴 사상가이며 교육가로 더 유명하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의 사람을 만들지도 않았다’는 말은 학문의 권장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2004년 새로운 지폐의 모델이 발표되었을 때 필자는 일본이 변화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일본 역시 우리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어디선가 풍겨오는 전체주의적인 냄새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2004년의 지폐모델은 장애를 가진 소외받은 지역의 의사, 서민을 이야기한 작가, 그리고 만민평등을 주장한 사상가였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평등’이라는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이번에 일본 지폐의 모델이 된 이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우선 천엔의 새로운 모델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이다. 노구치 히데요처럼 의사이자 세균학자이며 페스트균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천엔의 모델은 ‘쓰다 우메코’이다.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일본 최초의 여성 유학생으로 후일 쓰다주쿠 대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만엔 지폐 모델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그는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 국립 은행’을 설립했고 이후 많은 회사와 금융기관을 설립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기린맥주, 삿포로맥주도 그가 설립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절친한 사이였고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수탈에 앞장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얼핏 보기에는 의사는 의사로, 여성은 여성으로, 사상가는 은행가로 교체된 것 같다. 그러나 2004년의 모델들이 ‘사회적 약자와 평등’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혔다면 이번 모델들은 ‘발전과 성공’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은 느낌이다. 특히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쾌할 수밖에 없다. 굳이 이런 인물을 모델로 쓴 것은 일본의 우경화를 알리는 신호탄은 아닐까?

지금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런 시점에 일본의 노선이 우경화로 기울어지면 서로가 서로에게 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남의 나라 지폐를 보면서 제발 이런 생각들이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어느 글쟁이의 기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김준형 의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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